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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인터뷰-'노동 호민관'을 만나다] "포기 없는 도전으로 진보정치 터 닦겠다"이병렬 정의당 후보(경기 광명을)
▲ 이병렬 후보 선거사무소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국회의원선거는 더욱 그렇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노동자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친노동 후보들이 잇따라 출사표를 던졌다. <매일노동뉴스>가 '노동 호민관'을 자처하는 후보자들을 만나 그들의 고민과 비전, 포부를 들었다.<편집자>


이병렬(54·사진) 정의당 후보(경기 광명을)는 자신의 또래를 “진보정치운동 1세대”라고 강조했다. 바라보는 곳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민주노동당을 세웠고, 그제야 조직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진보정치가 시작됐다는 뜻이다.

1세대는 터를 닦는다. 터가 골라야 뿌리가 깊이 내린다. 잘 자란 뿌리는 알찬 열매로 돌아온다. 그가 몇 차례 고배를 마시면서도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 후보는 “진보정치운동 1세대가 10~20년 계속 문을 두드리면 후배들이 열매를 따지 않겠느냐”며 “노동정치를 인생의 종착역으로 삼고 끝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5일 오전 광명 철산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인생의 목표, 출세에서 노동운동으로"

-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있다면.


“장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집이 조부모를 못 모실 만큼 가난했다. 아버지가 7사단 운전병으로 전역했다. 그게 연고가 돼 어린 시절 강원도로 이사를 갔다. 화전을 일구고, 군부대에서 얻어 온 잔반으로 돼지를 키워 먹고살았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는지 곧 서울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는 노점상,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셨다.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당시 인생의 목표였다. 대학에 입학해 공부만 했다. 학생운동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1984년 무렵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렸다. 오랜 기간 회의가 이어졌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노점을 아예 못 열도록 했다. 어머니가 노점상이라 당장 생계에 차질이 생겼다.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창문 밖으로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게 눈에 띄었다. ‘노점상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2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하나의 시위가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이 후보는 85년 연말 서울 구로동에 있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는 것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을 역사변화의 주체로 인식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공부가 필요했다.

이 후보는 구로동 노동자들을 모아 노동야학을 운영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히고, 근로기준법을 가르쳤다. 이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거쳐 보건의료노조에서 활동했다.

“출세하려고 대학에 갔다. 동기들은 판검사로 일한다. 만약 그날 도서관에서 본 시위가 없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언젠가부터 운동은 생활이 됐다. 생활을 후회할 수는 없다.”

- 어떤 과정을 거쳐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나.

“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이듬해까지 엄청난 규모의 파업투쟁이 이어졌다. 노동법 재협상이 이뤄지긴 했지만 노동현실을 바꾸는 데 한계를 보이지 않았나. 노동자가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국민승리21이 만들어졌다.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세웠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창당 과정에 참여한 후 민주노동당 노동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오랜 기간 사무처 활동가로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후배들에게 역할을 넘겨야 할 때가 왔다. 2006년 민주노동당 소속 광명시장 후보로 출마하면서 광야로 나서게 됐다.”

이 후보는 2008년 총선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2010년에는 광명시장 선거에 나섰는데,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과 후보 단일화를 하면서 중도에 사퇴했다.

"지역 사회운동 주도, 철새 정치인과 달라"

- 광명을 출마지로 삼은 이유는.


“노동야학을 하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공부하러 온 해고노동자였다. 89년에 결혼했다. 광명에 있는 13평 서민아파트가 신혼집이었다. 광명은 옛 구로공단의 배후도시다. 노동자들이 아주 많다. 30년 가까이 광명에 살며 아이 셋을 키웠다. 광명에 출마한 것도 따지고 보면 노동운동과의 인연 때문이다.”

- 지역 현안과 대표 공약을 소개해 달라.

“이명박 정부 때 광명을 보금자리주택 예정지로 지정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정이 해제되자 빈 땅으로 남았다. 광명은 교통의 요지다. KTX역과 서남부 고속도로가 있고, 서서울톨게이트가 있다. 입지적으로는 서울과 인천, 경기 서남북을 잇는다. 빈 땅에 물류유통단지를 조성할 것이다. 친환경급식센터도 짓겠다. 지역의료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목표다. 시립요양병원 건립을 추진하겠다. 광명 인구가 35만명이나 되는데 보건지소는 하나뿐이다. 최소 인구 5만명당 하나의 보건지소가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 선거 표어를 "비정규직·청년·장애인·폐지 줍는 노인, 함께 살자"로 정했는데.

“일자리 양극화와 청년실업, 노인빈곤 같은 핵심적인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해결책을 모색하자는 차원에서 만든 말이다. 영국은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에 이미 무상교육·무상의료를 실현했다. 스웨덴에는 보수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무상교육·무상의료는 건들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우리 삶은 어떤가. 3인 가정으로 따지면 연봉이 1억원에 가까운데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기업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민주노동당 노동위원장 시절에 두 달간 평택에 내려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농성에 참여했다. 그때 ‘함께 살자’라는 구호가 뇌리에 박혔다.”

- 다른 후보와 비교해 어떤 경쟁력을 갖췄나. 야권연대에 대한 의견은.

“광명이 조성된 지 오래되지 않은 도시여서 그런지 철새 정치인들이 많다. 물론 외지에서 왔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고 지역 현안에 관심이 없는 정치인들이 많다. 나는 30년 가까이 광명에서 살았다. 지역에서 고등학교 평준화 운동과 무상급식 운동을 주도했다. 광명에서 잔뼈가 굵었다.

야권연대는 기본적으로 반대다.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을 저지하는 전술적·전략적 연대라면 가능하다고 보지만 그것도 확실한 전제가 있어야 한다. 진보정당의 독자적 생존을 보장하는 그런 연대여야 한다. 이 같은 전제가 없다면 내년 대선은 물론이고 선거 때마다 기계적인 야권 연대 요구가 되풀이될 것이다. 당 부대표를 맡고 있다. 전략상 비례대표 선거도 무척 중요하다. 완주하려고 한다.”

"노동운동을 인생 종착지로"

- 의정활동 계획은 어떤가.


“당이 ‘국민의 노조가 돼 월급 300만원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이를 실현하는 입법활동을 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최저임금을 현실화하고 비정규직 사용사유를 제한하는 입법에 나설 것이다. 보건의료노조 출신인 만큼 보건복지위원회에서도 의료공공성 강화를 목표로 활동하고 싶다.”

-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나.

“나와 또래들이 조직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한 진보정치운동 1세대라고 생각한다. 정치를 한다고 노동운동을 떠났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인생 종착지에 닿을 때까지 노동운동을 할 것이다. 몇 번의 낙선 경험이 있는 만큼 꼭 이기고 싶다. 물론 당선이 정치에 뛰어든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1세대들이 10년이든 20년이든 계속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다 보면 진보정치 후배들이 열매를 따지 않겠나. 내가 당선되는 것보다 진보정치가 뿌리를 내리고 훗날 결실을 거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정치와 노동운동을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도전하겠다.”

이병렬 후보는

- 1962년 충북 옥천 출생
- 연세대 법학과 졸업
- 전 민주노동당 노동위원장
- 전 보건의료노조 연대사업실장
- 현 광명시 생활임금심의위원회 위원
- 현 정의당 부대표


양우람  against@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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