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지 사람 대 회사의 관계가 아니다. 가족관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지 사람과 집의 관계가 아닌 것과 같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물인 회사가 관계를 맺을 순 없다. 이는 가족관계가 사람과 건물(집)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난센스다. 노사관계에서 '사'는 한자로 '모일 社'가 아닌 '부릴 使'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인 것이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인 사측의 '사'도 마찬가지다. 남을 부려서 일을 시키는 사람과 남에게 부림을 당하며 일을 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노사관계인 것이다.

노사가 대립적인 관계라고 할 때 이는 노동자가 회사와 대립한다는 말이 아니라 노동자와 사용자가 대립한다는 말이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립은 불가피하다. 권리와 이익에서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권리가 강화되는 걸 원하는 사용자는 어디에도 없다. 노동자 권리 확대는 사용자 권리 축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 이익이 개선되는 걸 원하는 사용자도 없다. 권리에서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용자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많은 이론가들이 노동자와 사용자의 권리와 이익이 같다는 이론을 만들려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환상이 현실을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노사관계를 노자관계라 부르기도 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라는 말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 노사관계의 본질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회사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결합된 공적 조직의 성격을 띤다. 기업 내부로는 소유자·주주·경영자·관리자·노동자 등이 있고, 기업 외부로는 소비자·하청업체·지역사회·정부 등이 있다. 안팎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 기능을 못할 경우 기업은 문제에 봉착하고 위기를 겪게 된다. 복잡다기한 현대 경제에서 자본주의 초창기처럼 회사를 일인독재나 세습왕조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걸맞은 권리와 책임을 지고서 기업 경영에 관여하고 개입할 때, 그 기업은 이윤 추구라는 속물적 욕망을 넘어 이해당사자 모두의 자아 실현과 사회발전 기여라는 공익적 가치 실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노사관계라는 말의 포인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용자가 세습군주가 지배하는 왕국 같은 회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노동자가 회사의 신민이나 노예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나 사용자나 회사의 동등한 구성원이다. 사용자가 노동자에 대해 독재적 지위를 갖거나 배타적 권위를 행사해선 안 된다. 물론 자본주의는 기업 재산에 대한 자본을 소유한 사람의 배타적인 소유권이 법·제도와 관행으로, 다른 말로 하면 공적 폭력과 사적 폭력을 통해 보증되고 관철되는 체제다.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자본주의의 자본가 독재적 본질에 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 덕분에 사회적 시장경제나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해 다양한 변종의 자본주의를 현대 경제에서 목도해 왔다.

민주사회에서 소유권을 장악한다는 것과 기업 경영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상식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정치와 종교의 결합이 비극을 낳았듯이 소유와 경영의 결합은 괴물을 만들어 왔다. 소유권에서 분리된 경영권의 핵심은 사업장 안에서 일인독재 혹은 계급독재의 종식이다. 그 핵심은 노동자 경영참가다. 노동자 경영참가 없는 주주자본주의 스타일의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소유자-사용자의 거수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노사관계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물의 관계로 대치하려는 시도는 역사가 오래된 이데올로기 공세다. 죽은 대상인 사물에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명력을 불어놓으려는 시도를 부정적인 표현으로 물신화(物神化)라고 한다. 문제의 당사자는 사물 뒤로 숨고, 죽은 대상인 사물이 인격의 탈을 쓰고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연기를 한다. 이런 경우 노동자는 노사관계 문제의 본질을 사람에게서 찾지 않고 회사라는 무생물에서 찾음으로써 문제 해결의 단초를 벗어나게 된다.

회사가 문제인 것은 회사라는 현대 경제의 조직체가 나쁜 의지나 욕망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무생물은 의지나 욕망을 갖지 못한다. 죽은 사물이기 때문이다. 회사가 문제인 것은 회사를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사람, 즉 자본가나 사용자가 이윤 극대화라는 나쁜 의지와 부당한 욕망을 갖고 노동자를 학대하기 때문이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가는 사업장 안팎에서 폭력·착취·차별을 극대화할 욕구를 느낀다.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경쟁에서 자유로운 자본가는 없다.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공장 안에서 독재를 휘둘러 온 자본가의 권리와 이익에 도전하고 맞서 싸워 온 역사가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다.

폭력·착취·차별을 통한 이윤극대화라는 자본가와 사용자의 인격으로 회사 조직을 물신화하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는 인사경영권이 자본가와 사용자에게 배타적·독점적으로 종속된다는 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자본가가 소유권과 더불어 인사경영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체제를 계급독재 사회라 한다. 역사상 그런 사회는 존재했는데,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세계전쟁으로 치닫던 19세기와 20세기 초가 그랬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인류를 절망으로 몰아넣은 전쟁과 인류를 희망에 들뜨게 만든 혁명이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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