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꿈꾸는 노동자들과 함께 통곡하고 노래하는 사람. 분노가 끓어넘치는 노동자·민중의 현장에서 고삐 풀린 소처럼 불의를 향해 돌진하는 투사. 꿈을 꾸다 잡혀가는 집회·시위 기획자. 세상과 동지들을 향해 자신의 선의를 이해시키려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언제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지만 시를 휴대하고 나타나는 수상한 사람. 국적 불명의 이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시인 송경동.

그는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꼬막이 유명하고 주먹자랑을 하지 말라는 곳. 소년원 출신이니 학창생활이 좀 거시기했음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 시절을 시인은 “위악스럽게 자신을 학대하며 불량으로 향하던 내게 문학은 사실 딱 하나 남은 구원의 장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책을 읽고 습작을 하던 청년의 직업은 노가다판 잡부였다. 청계천 허름한 잡부 숙소가 육신의 집이던 시절이었다.

20대 초반 노동현장 정서에 푹 침윤돼 있던 어느 날 집안일을 하다 부친께 포복절도할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에, 행님 거기 투인치 못 좀 주쇼.”

2년여가 지난 후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8만원의 지하방을 얻고 함께했던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시로 적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의 시작은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서였다. 지금의 아내와 함께 구로노동자문학회와 전국노동자문학연대에서 활동했다.

2001년 전평 시절에 철도노조 조합원이셨고 산생활을 하셨던 장인어른의 이야기와 철도·전력노조의 민주화 과정을 보고 기뻐했던 이유를 나중에 알았다. 2002년 발전파업 연대투쟁과 정유공장 노조간부와 대의원이었던 형제 이야기도 술잔을 기울일 때 들었다.

지나온 삶의 궤적과 동선 안에 같이 있었던 사람을 만나는 흥겨움이 있다. 필자가 수없이 달려갔던 기륭투쟁에서 온몸을 던지던 송경동 시인을 멀찍이서 관찰만 하고 선뜻 인사하지 못했다. 민망함에 대한 사과는 술 한잔 사는 것으로 대신했다.

2011년 송경동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조직하고 있을 때 필자는 이명박 정권의 발전노조 파괴에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같은해 9월 전해투 임시의장을 맡아 전국해고자조직 재건에 나섰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희망버스 기획단과 사무실을 같이 쓰게 됐다.

툭툭 던지는 짧은 대화 속에서 실타래가 풀리듯이 확인되던 숱한 인연들. 존재 조건의 차이를 불문하고 당위로 다가오던 함께해야 할 이유들. 그렇게 지난 5년여의 인연이 본격화했다.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2011년 가을날, 한진중공업 69명 해고자들은 중앙노동위원회 심판회의를 앞두고 있었다. 이전 해 2월부터 민주노총 노동위원회 사업단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한진중공업 해고자 사건의 중요성을 귀가 닳도록 강조한 이도 송경동이었다. 엄청난 부담감 속에 한진중공업 사건을 필자가 직접 맡아 엄청난 양의 서면을 독파하느라 눈이 침침해질 지경이었다.

결국 중앙노동위 심판회의 과정에서 이틀간의 점거사태까지 겪으면서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노사합의서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김진숙은 살아서 내려왔다. 송경동과 정진우는 구속의 길을 떠났고 민주노총 13층에서 구속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허허로운 배웅을 했다. 이후 쌍용자동차 투쟁과 현대자동차 희망버스, 유성기업 희망버스, 세월호 만민공동회, 스타케미칼희망버스 등 시인의 영감을 통해 노동운동의 한계 극복과 확장을 같이 꿈꿨다. 시를 통해 발휘돼야 할 ‘시적 허용’이 조직운동을 하는 필자에게는 상당한 긴장과 새로운 도전 과제를 부여했다. 술과 스트레스가 증가한 것도 나의 소중한 벗 송경동 덕이다.

며칠 전 그의 세 번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출간됐다. 송경동은 그동안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발표했다. 제12회 천상병 시문학상과 제6회 김진균상, 제29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사실 시집 제목을 듣고 피식 웃었다. 2002년 발전파업 때 한 나라의 전력망을 걸고 파업하는 발전노조 위원장과 조합원들에 대해 "한국인이 아니다"고 했던 산자부 장관의 망언이 떠올라서다. 자칭 무국적인 송경동. 바라기는 ‘만국적인’ 송경동이 되기를. 시상 풍부한 번역자들에 의해 만국적 시인 송경동의 시가 각국 언어로 소개되고 읽히기를 바란다.

송경동은 “시란 삶의 밭을 일구는 농기구 같은 것”이라고 했다. 농기구는 삶을 영위하는 생산수단이 되기도 하고 유사시에는 분노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가 ‘사소한 물음들에 답하는’ 시를 쓰게 될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T. S. 엘리엇은 “25세 이후에도 시인이고자 하는 자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미 10대부터 척박한 현실을 비껴가지 않으며 역사의식으로 벼린 시어를 던져 온 저항과 변혁 시인. 자랑스럽다, 만국시인 송경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