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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와 관련한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성
▲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어떤 특정한 제도의 구축은 언제나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되는 하나의 레짐(regime), 즉 일정한 체제를 형성한다. 제도라는 것은 국가가 주인이 돼 집행하는 하나의 강권체제를 전제한다. 쉽게 말해 어떠한 목적과 명분, 가치를 이루기 위해 사회적 주체들이 이러이러한 것들은 해도 되고 저러저러한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 바로 제도다.

국가는 그렇게 구축한 제도가 현실에서 실행되도록 관리하고, 그것을 어긴 사회구성원에게 민형사상 제제를 가하는 배타적 권한을 해당 주권국가의 영토 내에서 부여받는다. 막스 베버가 국가를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한 집단"이라고 칭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한마디로 제도는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는 하나의 원리를 방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노동법은 사회가 존속되고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생산활동과 분배활동의 기본 골간을 규정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우리나라 노동법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 다른 나라의 것을 베껴서(copy) 형성됐다. 대표적으로 오늘날 한국인들의 일하는 조건을 규정하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로기준법은 1953년 이승만 정권하에서 명목적으로 갖춰진 것이었다. 농업사회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 그리고 3년의 내전을 겪은 후의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에서 당시 근기법이 갖는 의미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근기법은 이후 60년대 군사정권하에서 산업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일정하게 고용·근로·해고 등을 규율하는 기초원칙으로서 그 기능상의 실질성을 보다 갖춰 갔다. 그렇다고 그 실질성이 문자 그대로 강한 것은 아니었다. 법에 명문화된 내용과 실질적 집행의 괴리는 컸다. 70년 전태일 열사가 산화하면서 외친 외마디 구호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였듯이, 당시 노동자들의 일상에 비춰 보면 거의 사치에 가까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일정하게 사용자들에게 적지 않은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근로시간에 대한 규제와 채용·퇴직·해고에 대한 규제 등은 사용자들의 남용을 막고 일정하게 개별 근로자들을 보호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기준과 관련한 여러 가지 규정들은 상대적으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보다 실질적인 의미를 채워 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준수의 정도나 적용의 범위에서 한계가 큰 것은 말할 나위 없겠지만….

여전히 ‘일하기’ 조건을 규정함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근기법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근기법이 만들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한 '53년 체제'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산업활동 조건과 고용조건 및 인구구조의 변화, 여타 제도의 발전 등으로 인해 근기법은 사회적 의미와 기능에서 변화를 겪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고성장시대, 제조업 중심 산업사회, 고용형태에 있어서도 정규직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기본으로 간주되던 시대, 다시 말해 노동자들의 이질성이 적었던 시대상을 반영해 형성된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시대적합성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즉자적인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검토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단순히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전문가들과 이해당사자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을 구축해야 한다. 분명 현재의 일자리 문제는 현재의 제도에서 파생되는 면이 크다. 이 큰 과제를 미래지향적으로 감당해 갈 수 있는 정치가 나타나야 한다. 지금까지와 같은 모습이 아닌.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박명준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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