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달 기자

유신반대 시위로 13개월의 수배생활에 이은 연행과 감금, 강제징집, 철근노동자 생활, 늦은 복학과 졸업, 교사 생활 그리고 전교조.

손호만(58·사진) 전교조 대구지부장의 젊은 시절은 파란만장했다. 3개월 넘게 헌병대에 구금되는가 하면 세 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매일노동뉴스>가 9일 손호만 지부장을 대구 수성구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손 지부장의 ‘운동’ 이력은 1978년 11월7일 대학교 2학년 때 유신반대 시위에서 시작했다. 그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13개월간 수배를 당했다. 도피생활 중에도 그는 서울 면목동 동일교회에서 야학(동일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그때 YH노조 조합원이던 고 김경숙씨를 만나기도 했다. 김씨는 이듬해 8월11일 신민당사 농성 도중 경찰 진압에 맞서다 목숨을 잃었다.

손 지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수배생활에서 풀려나 80년 3월 대학에 복학했지만 불과 2개월 만인 5월 비상계엄확대조치로 대구 50사단에 연행됐다. 헌병대는 그를 3개월 넘게 감금하다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손 지부장은 당시를 “내 평생 가장 많은 매를 맞았던 때”라고 회고했다. 그는 군사재판 중 강제징집돼 ‘녹화사업’에 투입됐다. 제대 뒤에도 공안사건에 연루돼 1년6개월형을 받고 6개월간 복역했다. 출소 뒤에는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와 민중교회를 근거로 노동운동을 하다 86년 다시 구속됐다. 10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현대사는 그의 개인사에 그대로 투영됐다.

손 지부장이 노동운동을 시작한 것은 88년이다. 민중교회인 달구벌교회의 도움으로 노동상담소(일꾼의 집)를 개설하면서다. 당시를 “가장 변혁적인 노동운동 시기”로 기억하는 그는 이를 바탕으로 대구노동교육협회를 만들었다. 93년 폐결핵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요양생활을 하면서도 철근을 가공·조립하는 일을 배워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97년 외환위기 국면에서 위기를 느낀 건설노동자들이 대구건설일용노조를 결성했는데 그는 노조 철근분회 사무장을 맡았다.

2000년 42살이 되던 해에 대학에 복학했다. 2001년 9월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받았다. 교사가 되면서 전교조에 가입했다. 그는 “주로 공고에서 근무했다”며 “노동인권교육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2014년 12월 대구지부장에 당선됐다.

전교조 활동도 험난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른바 '진보교육감 벨트'에서 벗어나 있는 대구시교육청은 다른 시·도 교육청에 비해 전교조에 날을 세우고 있다.

“올해 1월21일 서울고등법원 법외노조 판결 이후 교육부가 발 빠르게 네 가지 탄압조치를 단행했습니다. 노조전임자 현장 복귀와 노조 사무실·비품 환수, 단체협약 해지, 각종 위원회 위원에서 해촉하는 조치를 취했어요. 대구시교육청은 전국에서도 가장 앞장서 탄압을 가해 오고 있습니다.”

교육부는 83명의 전교조 전임자를 학교로 복귀시키라고 명령한 상태다. 손 지부장은 이를 두고 “대량 해직사태가 예상되는 조치”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대구지부도 전교조 투쟁에 발맞춰 현장복귀를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직사태를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전교조는 1천500여명의 해직,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구속과 투옥 속에서 탄생한 조직입니다. 이것은 전교조가 어려울 때마다 투쟁정신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큰 버팀목이에요. 현재 법외노조 상황이 되면서 어려워졌다고는 하나 이러한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전교조는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워 나갈 겁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교조 대구지부 조합원은 2천300여명이다. 12개 지회, 400여개 분회로 구성돼 있다. 그는 “2013년 박근혜 정권의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조합비 수납을 CMS로 전환했는데 이때 일시적으로 조합원이 20% 정도 감소했지만 이후에는 탈퇴보다 오히려 가입이 많다”고 귀띔했다.

손 지부장은 이어 “총체적인 노동개악 국면에서 노동자들이 연대해 함께 투쟁하지 않고서는 혼자 힘으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며 “전교조는 전교조 조합원들만의 조직이 아님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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