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태우 기자

한낮 기온이 18도까지 오른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 앞.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반도체 소녀상'이 봄바람을 맞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모습을 본떠 한 대학생이 만들었다는 반도체 소녀상은 지난 겨울 노숙농성장에서 모진 한파를 견뎠다.

이날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특별했다. 우선 삼성전자 본관 앞 농성이 150일을 맞았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직업병에 걸린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 논의를 재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삼성전자 산업재해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떠난 고 황유미씨의 아홉 번째 기일(3월6일)을 맞아 추모문화제를 여는 날이었다.

농성장은 하루 종일 분주했다. 오전에는 3월을 삼성전자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달로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했고, 오후에는 천주교·불교·기독교 3대 종단 종교인들이 추모기도회를 열었다. 종교인들은 삼성전자에서 직업병에 걸려 숨진 76명의 넋을 위로했다. 저녁에는 추모문화제가 개최됐다. 온종일 농성장에서 울린 목소리는 “더 이상 수많은 황유미의 아픔과 고통을 삼성전자가 외면해선 안 된다”는 호소였다.

황유미 숨진 지 9년째 꿈쩍 않는 삼성전자

추모의 달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한 반올림 활동가와 삼성전자 산재 피해자 가족은 삼성전자에 대한 섭섭한 심경을 쏟아 냈다. 반올림 농성이 150일 지속되는 내내 삼성전자가 “직업병 피해보상을 원하면 (삼성전자가 자체 설립한) 반도체 백혈병 보상위원회에 먼저 신청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반올림은 △보상대상 질병 △보상금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교섭에서 재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가 스스로 요구해 구성된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뇌종양 피해자인 한혜경씨의 어머니인 김시녀씨는 “아픈 딸의 볼이 얼어붙는 모습을 모습을 보면서 한겨울 농성을 함께했다”며 “직업병 피해자들이 떼쓰는 것도 아닌데 삼성전자가 전혀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세월호 참사와 삼성전자 직업병은 닮은꼴?

추모문화제에서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눈길을 끌었다. 유가족들이 구성한 4·16 합창단이 그 주인공이다. 노란색 옷을 입은 20여명의 합창단원들은 무대에 올라 ‘잊지 않을게’를 합창했다.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우리 가슴에 새겨 놓을게"

세월호 참사와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은 그렇게 공명했다. 송경동 시인은 “삼성전자가 진실을 밝힐 때까지 반올림과 함께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제 참석자들은 고 황유미씨를 비롯한 12명의 영정 앞에 국화꽃을 놓았다.

3대 종단 종교인들은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사망한 76명을 위로하는 추모기도회를 열었다.

“삼성직업병 피해자 망인 황유미 연가….”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은 직업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정수용 신부는 “이 자리에 있는 반올림과 직업병 피해자 가족들은 욕심쟁이도 아니고 고집쟁이도 아닌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길 바라는 사람들”이라며 “삼성전자가 큰 힘을 가졌다고 해도 거짓을 진실로 바꾸고 (직업병 문제를) 없는 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한웅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는 시간을 끌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삼성이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다”며 “삼성전자는 수십 조원의 이익을 내는 데 기여하다 병에 걸린 직업병 피해자들을 위해 조속하게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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