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노조가 지난 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산별중앙교섭과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을 병행하는 내용의 올해 투쟁방침을 확정했다.금속노조

“지금까지 금속산업 노사 중앙교섭은 ‘난쟁이들의 행진’이었다. 교섭에 나오는 노조들은 회사에 임금인상을 요구할 힘이 없다. 사용자들 역시 이익의 상당 부분을 원청인 현대차그룹에 빼앗겨 왔다. 그러니 회사 꼴이 엉망이다. 약자들이 창출한 부가가치가 강자들에게 흘러들어간 결과다. 금속노조가 현대차그룹사 노사로만 교섭테이블을 꾸리겠다는 것은 ‘강자들만의 리그’를 만들겠다는 얘기다.”(박태주 한국기술교육대 교수)

“현대차그룹의 영향력, 특히 현대차 노사관계가 금속산업 노사관계 전반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그룹사교섭이 침체에 빠진 산별교섭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현대차 계열사 노조들이 기존 투쟁관성에 따라 물리적 대응으로 일관하거나 임금인상에 몰두할 경우 사회적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내 자동차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사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금속노조가 올해부터 산별중앙교섭과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을 병행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우려와 기대의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당장은 비판적 시각이 우세하다. 노조가 그룹사교섭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와 이행경로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룹사교섭을 위한 요구안도 확정하지 않은 상태다.

노조는 지난 3일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현대차그룹사 교섭방침을 확정했다. 김범진 노조 기획실장은 “중앙교섭이 정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에 따라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을 제안했다”며 “노조가 중심이 돼 그동안 현대차그룹을 중심으로 이뤄진 왜곡된 패턴교섭을 바로잡고, 이를 기반으로 중앙교섭을 강화하자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앙교섭은 기존대로 진행하되 현대차그룹사 교섭 테이블을 별도로 가동하겠다는 것이다.

노조 스스로 인정하는 것처럼 금속산업 노사의 산별중앙교섭은 침체에 빠져 있다. 중앙교섭에 참가하는 조합원수로도 확인됐다. 지난해 10월 현재 노조 조합원 15만2천183명 가운데 중앙교섭 참가 조합원은 1만6천778명에 불과하다. 전체 조합원 대비 11%다.

금속산업사용자협의회에 따르면 중앙교섭 참가 사업장은 2008년 104곳에서 지난해 67곳으로 감소했다. 2006년 완성차 4사 대공장노조의 산별전환으로 본격적인 산별시대 개막을 알렸던 노조가 지난 10년간 그린 초라한 자화상이다.

중앙교섭 회피하는 현대차 노사

중앙교섭이 이름에 걸맞은 위상을 갖추지 못하고 침체에 빠진 이유는 기업별 교섭체계를 선호하는 대공장 노사의 습성 탓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용자들은 산별교섭 결과로 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노동조건이 상향평준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노조도 다르지 않았다. 대공장 노동자들은 평등지향적인 중앙교섭보다는 기업의 수익이 고임금으로 되돌아오는 기업별교섭을 선호했다. 노·자 간 암묵적 동맹이 이뤄진 셈이다.

사용자 내부 이질성도 중앙교섭을 약화시킨 요인 중 하나다. 노조는 원·하청 관계에 있는 완성차기업과 중소 부품업체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채 중앙교섭 확대 전략에 매달렸다. 이를 두고 노동계 내부에서조차 “코끼리 냉장고에 집어넣기 같은 무모한 시도”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결국 노조 스스로 새로운 산별교섭 구조의 상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중앙교섭을 위축시킨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가 올해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 전략을 들고나왔다. 노조 내부 의견도 분분하다. 노조는 지난달 2일 전국 지회장 합동수련회를 열고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 방안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방침에 찬성한 경남지부 관계자는 “산별교섭이 형해화된 상태에서 현대차그룹사 교섭방침은 대단히 유의미하다”며 “다만 노조와 그룹사 지부·지회가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되고, 노조가 그룹사교섭을 지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침에 반대한 경주지부 관계자는 “그동안 현대차그룹사 교섭이 잘못돼 왔는데, 노조가 이를 정당화하겠다는 것인가”라며 “중앙교섭을 강화하는 것이 원칙이고, 그룹사교섭을 하더라도 그 목표가 중앙교섭 참가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김성락 금속노조 기아차지부장이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 방침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금속노조

금속노조, 연대임금전략 포기하나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보다 냉정한 시각으로 노조 결정을 바라보고 있다. 박태주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산별교섭 회피전략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현대차 노사의 관행이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번 결정은 기본적으로 산별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박 교수는 “한국적 상황에서 산별노조에 부여된 가장 주요한 과제는 비정규직 문제와 일자리 문제, 원·하청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며 “현대차그룹사 교섭방침은 재벌기업의 물적 토대를 활용해 해당 노조들이 자신들의 임금을 높이겠다는 발상으로 '연대임금전략'이라는 산별노조의 지향에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현대차와 비현대차 조직 간 위화감을 조성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반면 노조의 새로운 시도 그 자체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그동안 현대차 노사가 한국 노사관계의 패턴세터 역할을 해 왔고, 현대차 계열사 노사가 통상임금 같은 현안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룹사교섭 방침이 그룹 내 중복교섭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배 연구위원은 그러나 현대차그룹사 교섭이 임금의제에 매몰돼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국내 자동차산업도 조선이나 철강업계 경우처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노사 대결 구도보다는, 노사가 함께 위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자동차산업 발전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현대차 회사측은 노조의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 방침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회사 관계자는 “요구안이 제출되면 법적 검토는 해 보겠지만 그룹사교섭에 임해야 할 의무는 없다”며 “노조가 각기 다른 기업별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노조가 요구안을 제출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대결국면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노조와 현대차 계열사 지부·지회 대표자들은 10일 그룹사교섭을 위한 요구안을 확정한다. 요구안에는 △재벌기업의 사회적 책임 △통상임금 등 현대차그룹 임금문제 △원·하청 불공정거래 해소방안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 주장대로 그룹사교섭이 중앙교섭을 강화시키는 교두보로 작용할지, 오히려 중앙교섭을 약화시키고 노조 내 양극화를 심화하는 결과로 귀결될지 업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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