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다. 상품은 대개 설비·원료(내지 부품) 그리고 노동력이 배합돼 만들어진다. 어떤 특정 상품의 생산업자에게 필요한 설비와 원료는 또 다른 상품 생산업자들에 의해 제조된 상품 형태로 시장에서 거래돼 조달된다. 노동력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력이 거래되는 시장을 노동시장이라고 부른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은 지속적인 고용관계 없이 그때그때 자유로이 구매와 판매가 이뤄질 수도 있으나, 일정하게 고용이라고 하는 지속적인 계약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한 계약에는 정년·휴가·승진·사회보험 그리고 기업복지가 보장되는 정규직과 그러한 것들이 전부 혹은 일부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으로 나뉜다. 비정규직들은 대개는 기간제 계약형태를 취하며, 최근에는 다른 것들을 일정하게 양보하고 정년만 보장한 무기계약직도 나타나고 있다.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일반 상품과 달리 해당 사회구성원의 생존 내지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조건의 제공까지 노동력 구매자가 책임질 것을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그가 그러한 책임을 거부할 경우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입해 그것을 생산물이나 용역이 거래되는 일반시장에서의 상품을 만드는 일에 일회적으로 사용하고서 버린다면, 사회적인 문제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팔려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자산을 소유하지 않은 자들로, 노동력 판매 없이는 생계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고용관계는 노사 모두 그리고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돼 왔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숙련되고 신뢰할 만한 노동력과 지속적인 거래관계를 유지해 그를 생산활동에 안정적으로 투입하는 일은 시장에서 선호되는 상품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공급하면서 이윤을 창출하는 결정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안정적인 고용관계는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것의 탄생은 자연스럽게 현대적 의미의 노사관계 형성과 궤를 같이한다. 한편으로는 개인과 사용자의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토대로 하고(개별적 노사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인들의 집단적인 권리를 수호하는 노동조합 활동 보장(집단적 노사관계)을 전제로 한다. 현대적 의미의 노사관계는 자주적인 노동자들의 결사체, 다시 말해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났다. 노동조합 없는 노사관계도 상당히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원론에 비췄을 때 예외적이며, 그조차 노동조합의 존재를 전제로 한 제도 위에서 형성되는 특수한 상황이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조합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으나, 노동조합에 어느 정도의 권한을 부여할 것인지는 노동조합 탄생 이후 오늘날까지 끊임없는 정치적 쟁점이 돼 왔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것이다.

현대사는 노동조합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어느 정도의 사회발전 단계에 이르고 나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반면 노동조합을 지나치게 추종하고 역성드는 방향으로만 빠졌다가는 사회와 경제의 운용에 있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준다. 노동조합의 권한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가 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optimal)에 대한 답은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노사관계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상 내지 소재이기도 하며, 사회 변동에 맞춰 끊임없이 재정의된다.

노동조합에 대한 인정의 약화는 고용관계에 대한 노조의 개입 약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 입장에서 제도적으로 지속가능한 일터가 보장되지 않는 쪽으로 환경이 움직인다는 것을 뜻한다.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노사관계는 분명 그렇지 않은 상황과 비교해 새로운 색깔을 띨 수밖에 없다.

1987년 이뤄진 자발적인 노동자들의 대투쟁과 당시 급속하게 이뤄진 노동조합 조직화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노동조합을 새롭게 인정하면서 노조 활동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로서, 노사 간의 건강한 긴장과 상호공존의 원리를 형성할지를 놓고 고심해 왔다. 그것은 민주화의 심화와 궤를 같이하기도 한다.

보수정부가 재집권한 지난 8년여 동안 상황은 그러한 방향성을 트는 쪽으로 움직였다. 지금 ‘노동개혁’의 이름으로 단행되는 실천들도 그 연장에 놓여 있다. 고용관계의 재정의를 놓고 벌어지는 여러 가지 논쟁들과 정책적 대립은 그 이면에서 암묵적·명시적으로 모두 노사관계의 재정의, 즉 노동조합 권한에 대한 재정의를 겨냥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불안정한 일자리 확대와 노동조합 권리 약화로 요약된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답일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고용을 지켜 낸 독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독일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저 앙겔라 메르켈이 수상이어서가 아니다. 바로 강하고 합리적인 노동조합이 사회 전반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같은 나라는 고용관계 안정성의 일시적인 약화와 유연화가 필요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것을 동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조 스스로도 현재 조합원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넘어 노동시장 전체의 상황을 바라보고 그에 맞춰 행동할 수 있는 합리성과 지혜 그리고 유연성을 겸비해야 한다.

현재의 주도적인 방향성과 달리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이 같이 살아나는 쪽으로 한국 사회가 변화할 수는 없을까. 양자의 변증법적 상호 (하강이 아니라) 상승의 길을 내기 위한 보다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