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노동운동에서는 자본주의 반대가 없다. 신자유주의 반대가 기본 노선으로 돼 있다. 세계경제 대공황이 초래된 원인도 신자유주의에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좌파 우파를 가릴 것 없이 공통된다. 물론 극소수 마르크스주의 정파는 그렇지 않지만.

이번 경제공황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 때문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실천적으로 자본주의 반대를 노선으로 삼고 실천하는 부분은 매우 드물다. 예를 들어 수년 전 전체 노동·민중운동이 크게 단결하자는 노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이 만들어졌다. 그 연대조직을 만들 때 6·15 선언과 10·4 선언 이행을 강령에 포함시키느냐 여부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었다. 그런데 사회변혁과 관련해서는 거의 모든 단체가 신자유주의 반대를 노선으로 하자는 데 동의하고 자본주의 반대 노선에 반대했다. 더구나 세계경제 대공황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어떤 이유에서건 이 문제가 토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한다는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반대하기 어렵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분단국가 구조와 국가보안법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밖에도 상품과 자본 및 자본주의를 인위적으로 폐지할 수 없다는 상식이 또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옛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 운동권 안에서조차 자본주의 반대가 사라진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그 이전에는 활동가들은 모두가 자칭 혁명가였고, 혁명가들이 꿈꾸는 세상은 사회주의 사회였다. 따라서 사회 일반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운동권 안에서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이런 컨센서스는 급변해 혁명이 개혁으로, 자본주의 반대가 자본주의 긍정으로, 나아가 자본주의 물신숭배로 바뀌었다. 자본주의를, 과거에 인간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미래에 인간에 의해 개조될 수 있는, 하나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우주와 지구 같이 인간이 변혁할 수 없는 자연 물질처럼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왜 이렇게 자본주의에 대한 물신숭배에 벗어나지 못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상품·자본의 물신숭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가장 많이 읽는 <자본> 한글 번역본에서도 상품 물신숭배가 오역돼 있을 정도다. 영어본에서는 해당 내용이 이렇게 돼 있다.

"To the producers, therefore, the social relations between their private labours appear (…) as material [dinglich] relations between persons and social relations between things."(강조는 필자)

그런데 한글 번역본에서는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자기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 물건을 통한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 그리고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고 돼 있다.

문장에서 강조한 부분을 글자대로 옮기면 “사람들 사이의 물적 관계로”라고 번역해야 한다. 한편 독일어 원본을 텍스트로 한 다른 한글 번역본에서는 이 구절이 “사람들 간의 물적 관계”라고 글자대로 번역돼 있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혼선이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하에서 상품과 자본은 인간들 사이에 직접 맺어지는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사물로서 나타나고 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르크스가 직접 교열한 불어본을 보면 이렇게 돼 있다.

"c'est-à-dire non des rapports immédiats des personnes dans leurs travaux mêmes, mais bien plutôt des rapports sociaux entre les choses."

불어판에서는 “(…)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 그 자체 안에서 맺는 직접적인 관계들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로 보인다”라고 고쳐 썼다. “사람들 사이의 물적 관계”라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구절을 아예 삭제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학습을 통해 상품과 자본 그리고 그 둘이 아우러진 자본주의가 자연적 사물(thing)이 아니고 사회적인 관계(social relation)라는 것을 깨쳐야 한다. 그래야만 사악한 자본주의 세상을 바꿀 엄두를 낼 수 있다. 상품·자본·자본주의가 우주·태양계나 지구 같은 자연적 사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변혁할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최근에 번역·출판된 <새로운 자본 읽기>라는 책의 저자는 학습을 통하지 않고는 자본주의 속에 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물신숭배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 점에서 노동자도 다르지 않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일면 수긍하지만 일면 반대한다. 자본가는 아무리 학습을 해도 자본주의에 대한 물신숭배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인간이 만든 사회적·역사적 생산양식임을 이해해도 그렇다. 자본주의가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본주의로부터 착취·소외당하는 삶 속에서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것을 꿈꿀 필요가 여타 계급 성원들이나 지식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그 책이 준거로 삼고 있을 듯한 노동자, 제국주의 모국의 노동귀족이 아닌 한 그렇다. 따라서 조금만 열심히 실천하면서 학습하면 우리는 자본주의 물신숭배에서 능히 벗어날 수 있다. 학습을 해야 한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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