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일. 고공농성을 벌였던 차광호씨가 땅으로 내려오는 데 걸린 기간이다. 아직도 서울에서는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100일을 훌쩍 넘겨 하늘에서 농성 중이다. 통계상 분규 사업장과 근로손실일수는 줄어든다는데 장기투쟁 사업장은 그대로다. <매일노동뉴스>가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 해법을 모색하는 연속기고를 게재한다.<편집자>
 

▲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신문사 노동기자들과 <굴뚝신문>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1987년 이후 ‘고공농성 연표’를 그리는데, 80~90년대 고공농성 기록을 찾기 어려웠다.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농성, 대구 남성물산 굴뚝농성 등 5건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결성한 전노협이 불법이었고, 경찰병력이 수시로 노동현장에 투입됐고, 노조 지도부가 구속되는 일이 숱하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민주노조는 생산라인을 멈추는 것으로, 연대파업을 벌이는 것으로 정권과 자본을 압박할 수 있었다. 굳이 높은 곳을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생산라인은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자본은 계약해지와 업체 폐업이라는 막강한 무기를 갖게 됐다. 반면 계약해지와 업체 폐업으로 비정규 노동자들은 현장을 멈출 다수의 조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극한투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2010년부터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강제 단일화 법안이 통과되고, 회사노조가 다수노조가 되면서 소수로 전락한 정규직노조도 고공농성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2000년 이후 고공농성은 105차례나 진행됐다. 고공농성 세계기록이 돼 버린 스타케미칼 차광호의 408일을 비롯해 한진중공업 김진숙 309일, 현대차 비정규직 천의봉·최병승 296일 등 이명박·박근혜 시대에 들어오면서 고공농성이 장기화됐다. 옛 국가인권위원회 옥상에 올라가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싸우는 기아자동차 최정명·한규협의 광고탑 고공농성도 22일로 257일이 됐다. 이틀만 더 지나면 유성기업 이정훈 동지의 옥천 광고탑 농성과 공동 4위가 된다. 공장 옥상에 올라가 싸우고 있는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신애자·구자현 동지도 76일이나 지났는데, 농성 소식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안정된 대기업노조는 공장 담벼락에 갇혀 연대정신을 잃어버리고, 산별노조는 연대와 공동투쟁의 구심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대, 싸움이 갈수록 장기화되고 더 높은 곳으로 더 오랜 시간 동안 내몰리는 이유다. 더 악랄하게 탄압하는 악질 사업주와 더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에 선 정권에 맞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신의 한 수’는 없다. 연대의 정신을 회복하는 길뿐이다.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연대는 기약 없는 시간을 견디는 힘이다. 삼성전자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사회단체들이 준비한 ‘밥 한 끼, 양말 한 켤레’는 소중한 힘이 됐다. 고향 강원도 삼척을 떠나 삼표 본사 앞에서 정규직 복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처럼 본사에서, 법원에서 정부기관 앞에서 싸우며 ‘서울 살이’를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점점 늘어 간다.

이들을 위한 작은 쉼터가 마련된다. 비정규 노동자와 그들 곁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이 ‘비정규 노동자의 집’(laborhouse.kr)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교통이 편리한 서울 도심에 마련될 비정규 노동자의 집은 따뜻한 밥을 맘 편히 먹고, 깨끗이 씻고, 더러워진 옷가지를 빨고, 포근하게 잘 수 있는 쉼터다. 아픈 몸을 진료할 수 있고, 아픔 마음을 상담할 수 있는 안식처다. 다른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민을 나누고, 먼저 싸워 이긴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소통의 장이다. 교육과 문화와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마당이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2억원 넘게 모였다. 3개월 동안 진행된 <다음> 스토리펀딩(storyfunding.daum.net/project/1070)에서는 6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3천만원이 넘는 금액을 모금해 줬다.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들은 통상임금 소송에서 승소한 금액의 일부를 기부했고, 쌍용자동차 변호인들도 법률기금으로 참여했다. 결혼하는 딸의 축의금으로 주춧돌 한 구좌를 신청한 어머니, 한 달 아르바이트 비용을 몽땅 보내온 청년들까지 소중한 마음들이 주춧돌이 돼 한 칸씩 쌓아 가고 있다. 일터로 돌아가는 긴 여행에서 잠시 쉬며 위로와 용기를 얻는 집이 영글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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