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저자는 이소선을 “존재 조건상 청계피복 조합원이 될 수 없는 제3자였지만, 이소선은 이 제3자라는 불법적인 한계마저 넘어설 수 있는 위치였다”며 이소선의 존재를 ‘불법’ 혹은 ‘제3자’로 규정했다. 이 불법적이고 제3자인 이소선이 “공권력·정부와 일상적 긴장감을 형성했고 그 긴장의 끈을 쥐고 있던 개인이 바로 이소선이었다”고 했다.

저자는 또 “청계피복노조의 투쟁은 과감하고 반정부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는 이소선의 구속·구타 등 그녀의 행동반경과 관련된 모든 사안이 '노조의 제1의 투쟁조건'이 되는 다소 예외적인 상황을 창출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노조는 쟁의행위도 하지만 일상적인 공간에서 사측과 힘겨루기를 통해 노동자의 지위를 안정화시키는 조직이기도 하다”며 “청계피복은 ‘노조’였을 따름인데 이소선-전태일이라는 상징의 수호 등이 더 중요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에 따라 “전태일이라는 상징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노조의 불안정화, 기층과 지도부의 괴리라는 문제점이 드러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사실 여부를 따져 보자. 이소선은 존재 조건상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근로기준법상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법이며 제3자인가. 그렇지 않다. 이소선은 조합원이 아니기 때문에 노조에 가입한 적도 없고 따라서 선거권·피선거권을 행사해서 임원이 된 적도 없다. 이소선이 맡은 직책은 자문위원·고문·노동교실 실장 등이었다.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70년대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산별노조다. 그렇기 때문에 상급조직에서 간부가 파견되기도 했다. 상급조직에서 파견된 최일호의 경우 노동교실 실장을 맡기도 했다. 이소선의 경우도 노조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위원 같은 범주로 간주하면 된다. 직원이든 전문위원이든 기타 노조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노조에서 고용하든지 추대하는 것은 해당 노조에서 자율로 결정할 문제다. 이를 두고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노조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소선이 청계피복노조의 제3자인가

이소선이 제3자라고 하는 것 또한 사실과 전혀 다른 얘기다. 저자는 무슨 근거로 제3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만약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제3자 개입금지법을 염두에 두고 제3자라고 했다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70년대에는 제3자 개입금지법 자체가 없었다.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1980년 12월31일 비상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노동조합은 외부단체와는 물론 단위노동조합 상호 간 또는 연합단체와의 관계 등이 완전히 차단됐다.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단순한 격려연설이나 성명 발표도 처벌하는 등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표현이 극히 모호한 대표적인 파쇼악법이었다.

제3자 개입금지법은 노동자 자주권을 침해한다는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92년 7월 유엔 인권이사회, 93년 3월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폐지 권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97년 3월 관련법을 개정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제3자 범위를 대폭 축소해 사실상 사문화됐다. 이런 법을 염두에 두고 이소선을 '불법'이라거나 '제3자'로 규정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다음으로 “공권력과 청계피복노조의 갈등은 전투적 노조와 공권력 간의 문제이기도 했으나 전태일이라는 상징과 이를 약화시키려는 공권력 간 지속적인 긴장관계이기도 했다. 이 긴장의 끈을 쥐고 있던 개인이 바로 이소선이었다”고 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노동조합법(현 노조법)상 공권력이 노조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해치는 간섭·간여는 그야말로 불법이며 그것이 바로 제3자 개입이다. 공권력이 노동조합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려고 부당하게 개입하고 도발하는 것에 긴장하고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소선이 공권력과 긴장의 끈을 놓아 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소선은 불법 혹은 제3자라는 이유로 노조에 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조 사무실·노동교실에는 공권력의 강압에 의해 육영수 사진이 걸리고, 대신 전태일이라는 존재는 망각 속에 묻어야 했을 수도 있다. 경찰·정보당국의 감시가 노골화되고 노조는 당국 요구에 맞춰 운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동교실의 경우를 보자. 청계피복노조는 노동교실을 사용주가 일방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반발해 노동교실 운영권을 되찾았다. 그 이후 75년 최종인 지부장 체제에서 노동교실 운영 목표는 다음과 같다.

“지부는 착실한 인간성의 완성을 목표로 삼는 도의교육과 경제적인 자원개발의 일환으로써 수행하는 생산교육 바탕 위에서 시장상가에 종사하는 영세근로자들의 교양과 기술지식을 계발해 긍정적인 생산자의 자세로서 사회정의와 복지사회를 실현시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근로자상을 확립함으로써 올바른 사회인으로서의 인격형성을 조장하려는 데 노동교실 운영의 목표로 삼는다.”

노동교실 운영 방침으로는 △도시 새마을사업의 표본이 되도록 노사협조체제를 갖춘다 △학교교육 직업훈련 협동조합교육 및 노사협조를 바탕으로 하는 궁극적인 모든 교육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노사협력으로 새마을복지사업을 실천한다고 명시했다(제5차 연도 대의원대회 75년 6월25일 사업보고서 137페이지).

이것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노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노동교실 목표와 방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착실한 인간성의 완성이란 현재 처해진 조건에서 불만을 가지지 말고 순응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향상을 위한 권리의식 고취교육은 없고, 경제적 자원개발을 위해 생산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조하는 것이 도시새마을 운동이고 노사협조다.

새마을운동은 70년 4월2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시행된 관 주도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이념은 근면·자조·협동인데, 한마디로 국민 노력동원 운동이다. 아니, 현실에서는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아 하루 14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하고, 그것도 성수기 때면 철야작업을 해야 하는 실정인데 여기에다 '근면하고 성실하라'는 운동을 했다. 자조는 또 무엇인가. 저마다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라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이소선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소선이 긴장의 끈을 놓아 버렸다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유언하며 산화해 간 전태일의 죽음은 헛되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소선은 최종인 지부장 체제가 물러난 뒤 노동교실 실장에 임명됐다. 이소선이 노동교실 실장이 된 이후 노동교실 운영은 그전과 비교해 완전히 바뀌었다. 노동교실 분위기는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 조합원 권리의식을 고취하는 노동교육을 활발하게 하는 교육의 장이 됐다. 노동교실은 조합원들이 근로조건 개선요구를 분출하는 투쟁의 장이었다. 여러 곳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연대의 장이 됐다. 지극히 정상적인 운영이었다.

전태일 정신을 지키는 것이 올바른 노조활동

그럼에도 당국은 공권력을 부당하게 동원해 노동교실을 강제로 폐쇄시키기에 이르렀다. 77년 7월 이소선을 연행해 구속시키고 동시에 노동교실을 봉쇄한 것이다. 이것은 정보당국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노동교실을 탄압하는 조치로밖에 볼 수 없다. 설사 이소선을 구속할 정도로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인정한다 해도 이소선 연행과 동시에 노동교실을 봉쇄한 것은 명백한 노동조합 탄압인 것이다.

그해 9월9일 조합원들이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노동교실에 진입해 "이소선 어머니를 석방하고 노동교실을 돌려 달라"며 농성한 것은 당국의 이 같은 노동조합 탄압에 대한 항의였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이소선의 구속·구타 등 그녀의 행동반경과 관련된 모든 사안이 '노조 제1의 투쟁조건'이 되는 다소 예외적인 상황을 창출했다” 고 썼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물론 이소선은 구속자가족협의회 같은 재야단체나 민주인사와 교류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전국 어느 사업장이든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곳이라면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함께 투쟁했다. 이렇게 활동하는 가운데 구타·연행이 잇따랐다. 그럼에도 이소선의 이런 투쟁을 청계피복노조 차원에서 ‘제1의 투쟁조건’으로 상정하고 투쟁하지 않았다.

이소선은 오히려 자신이 재야 민주단체와 연대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노조간부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직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데도 당국은 이소선을 압박하기 위해 청계피복노조 간부들한테 압력을 넣었다.

저자는 “청계피복은 ‘노조’였을 따름인데 노조로서 기능보다 민주화운동과 투쟁을 통한 문제의 해결, 이소선-전태일이라는 노조의 상징 수호 등이 더 중요했다”며 “전태일이라는 상징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노조의 불안정화, 기층과 지도부의 괴리라는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러니까 청계피복노조는 노조 기능을 저버리고 투쟁만 일삼아 민주화운동·전태일이라는 상징 수호에만 집착해 조직의 불안정화를 가져왔다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청계피복노조가 노조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당국의 요구대로 순응하고 노동교실을 불법·부당하게 강제로 봉쇄해도 그냥 지켜만 보고 이것이 운명이려니 하고 공권력의 처분에 맡겨야 했다는 얘기인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청계피복노조가 노조로서 기능하도록 공권력이 ‘일상적인 공간’을 언제 자유롭게 허용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정보당국은 끊임없이 감시하고 도발하고 압력을 가했다. 정부는 노사관계를 노사자율에 맡기고 만약 노조가 실정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하면 처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일관되게 노동조합을 일방적으로 탄압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노사가 대등한 위치에서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마치 새의 한쪽 날개를 꺾어 놓고, 꺾인 날개가 회복될라치면 또 꺾어 버리면서 왜 날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으로서 자주성을 지키고, 조합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민주화운동이고 그것이 전태일의 상징을 수호하는 것이라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별개가 아니고, 노동운동과 전태일의 상징은 별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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