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예고한 대로 지난 19일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9·15 노사정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꼭 1주일 전 김 위원장은 정부를 상대로 "양대 지침을 철회하고 노사정 합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간곡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1주일 동안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대통령 담화에서는 물론 주무장관조차 경제불안을 운운하며 노동계에 노사정 파행의 책임을 돌리기 급급했다.

오늘의 노사정 파탄 상황은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모순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한마디로 지침이 노사정 관계를 엎어 버렸다. 과연 지침이 무엇이기에 이런 파국을 가져온 것인가. 노동부 스스로 밝힌 것을 보면 지침은 행정처리 내부규정이다. 그야말로 아무런 법률적 구속력도 갖지 못하는 준칙에 불과하다.

상식에 비춰 그동안 법률도 아닌 지침을 정부가 굳이 강행하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1년 가까이 걸쳐 어렵사리 만들어 낸 수백 개의 노사정 합의 과제가 있음에도 정부가 양대 지침에 그토록 목을 매는 이유가 뭔가. 이번 노사정 합의 파기 과정에서 노동부가 드러낸 태도로 그 이유는 분명해졌다. 이제라도 확인이 돼 다행이다.

설마했지만 양대 지침에 담긴 내용은 노사정 합의의 가장 큰 목표였다. 바로 상시적인 구조조정 도입이 노사정 합의에서 얻고자 한 목표였다. 노동자를 상대로 드러내 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성과자라는 이유로 상시적인 일반해고를 도입하겠다면 어느 노동자가 동의하겠는가. 그래서 청년일자리를 재물로 삼았다. 거짓홍보를 통해 경제위기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돌리지 않았나.

이제는 숨겨 왔던 정부 속내가 드러났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답은 “안 된다”이다. 당연하다. 일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광고를 통해 “부적응으로 해고되는 것보다 훈련기회를 얻어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얻는 게 났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정부는 무엇으로 광고내용을 담보할 것인가. 아무런 근거 없는 거짓말이다.

김동만 위원장의 파기선언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법률도 아닌 행정부에게 재량이 있는 지침이므로 지금이라도 시행해야 한다, 경제가 위기인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위험한 발상이다. 무식한 주장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불가능하겠지만, 설사 논의되더라도 양대 지침은 분명한 법 재개정 사항이다.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제도는 근로기준법(제94조)에 관한 변경이고, 저성과자 해고제도는 새로운 제도 도입이기 때문이다. 상시적인 구조조정은 노동시장에 정리해고보다 더 큰 충격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권리의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같은 제도는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제정해야 할 문제다. 어찌 행정부 내부지침으로 운영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정부는 양대 지침 시행을 강행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사족을 달았다. 과연 누구 의견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누누이 확인되는 것처럼 지침 강행은 그 자체로 위헌·위법이다.

최근 사용자단체가 벌이는 1천만 서명운동에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엄연한 통치구조가 있는데 대통령이 서명에 나서는 게 온당한지에 대한 여론이 분분하다. 어느 편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와 같은 행위가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재자로서의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기대를 많은 노동자들로부터 깨끗하게 앗아 간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도 정부는 “대다수 노동자들은 정부 생각에 동의한다, 일부 ‘조직화된 정규직 노동자’만이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변명할 것이다. 백번 양보해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조직화된 정규직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고 무시해도 그만인 대상인지. 나아가 노사정 합의까지 ‘조직화된 노동자’를 합의 당사자로 인정해 온 정부 태도는 그저 합의를 위한 위선이었던 것인지.

대통령과 정부는 경영계에 쏟은 관심만큼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김동만 위원장이 두 달 가까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로 외친 합의 이행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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