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종영을 앞둔 이 드라마는 가족드라마를 표방하면서 청춘들의 사랑을 그려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응팔의 인기는 드라마 OST도 한몫했다. 가수 전인권 4집에 담긴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노래는 가수 이적이 다시 불렀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댄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꺼내어/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후략)."

심금을 울리는 가사를 듣다 보면 남 탓을 하며 심란했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비록 힘든 일이 많았던 옛 시절이더라도 나를 성장시킨 시간이었다면 굳이 남 탓을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후회 없이 꿈을 꿨던 시절이었다면. 그러니 내 탓이라고 훌훌 털어 버리자는 것 아닐까. 그래야 다 함께 노래할 수 있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13일 대국민 담화는 이런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박 대통령 담화는 “자화자찬 일색이었고, 남 탓으로 일관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쟁점법안이 처리되지 못한 것도, 9·15 노사정 합의가 파탄 난 것도 모두 국회와 야당 그리고 노동계 탓으로 돌렸다. 이러니 항간에는 박 대통령에 대해 “탓통령, 떼통령”이라는 비아냥까지 떠돈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번에도 박 대통령은 '잘한 것은 대통령 덕분이고 잘못된 것은 야당과 국회 때문'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며 “박 대통령은 국민화합과 책임정치를 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야당 탓하고 국회 탓만 하는 탓통령, 억지 주장과 무리한 요구만 하는 떼통령의 모습을 보여 줬다”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담화에서 “노동 5법 중 4법만 분리해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이 발의한 고용보험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근로기준법·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개정안 중에서 기간제법 개정안만 제외하자는 것이다. 대통령은 양보했다는데 야당은 거부하고, 노동계는 반발한 까닭은 무엇일까.

법안을 발의하고, 처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입법부인 국회 소관이다. 박 대통령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도를 넘어서는 처사다. 헌법에 규정된 입법·사법·행정이라는 삼권 분립을 훼손하는 것이다. 또 "노동 5법 중 4법만 분리해 처리하자"는 박 대통령의 요청은 자신의 의견만 옳다는 아집에 불과하다. 때문에 야당이 박 대통령의 요청에 화답해야 한다는 주장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노사정 합의 파탄도 엉뚱한 법안을 발의한 정부·여당의 조급증 탓에 빚어진 일이다. 정부·여당이 책임져야지 노동계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이 발의한 파견법 개정안에는 우려되는 대목이 많다. 파견법 개정안은 55세 이상 고령자와 전문직에 파견 허용업무 제한을 폐지하고, 뿌리산업에도 파견을 허용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박 대통령은 “파견법은 재취업이 어려운 중장년에게 일자리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법”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파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질 낮은 일자리가 확대되고, 비정규직만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작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근로조건 격차를 해소하는 내용은 이 법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제조업의 근간이라는 뿌리산업은 저임금과 불법고용이 만연한데도 일상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뿌리산업 기업에 파견을 허용해 봐야 인력운용이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열악한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않고, 파견근로만 활개 친다면 청년들이 뿌리산업 기업을 찾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박 대통령이 담화에서 “그간 꼬인 정국은 모두 내 탓이니 털어 버리자”라고 말했다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북핵으로 나라 안팎의 사정이 급박하고, 경제도 어려우니 국회와 노동계가 협조해 달라”고 호소했다면 야당과 노동계도 일정하게 화답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담화를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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