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주지하듯이 지난해 말 국회에서 이른바 노동개혁 5대 법안의 통과가 실패한 이후 최근 정부는 가이드라인·행정명령 같은 방식으로 저성과자에 대해 기업의 해고를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는, 말하자면 기업의 해고권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를 통해 편법 비용을 줄이고, 기업경쟁력과 신규인력 충원, 즉 외부자에 대한 고용기회 부여가 원활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 기업이 저성과자와 고용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길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기 힘들다. 알다시피 미국식 자본주의에서는 이를테면 하이어-앤드-파이어(Hire-and-Fire) 관행이 상당히 발달해 있다. 이러저러한 편법을 통해 이미 한국 자본주의에서도 그러한 일이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애초에 한국 자본주의는 미국 같은 식의 자유시장경제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서구에서 산업화의 시발이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질적으로 매우 상이한 제도적 조합을 형성하며 다르게 진화해 갔다. 근래에 회자되는 이론에 의하면 그것은 크게 자유시장경제(LME: Liberal Market Economy)와 조율된 시장경제(CME: Coordinated Market Economy)로 대별된다. 한국과 같은 나라는 굳이 따지자면, 둘 가운데 상대적으로 후자에 가깝다. 다만 조율의 핵심적인 주체에 있어 서유럽 국가들이 국가뿐 아니라 협회나 이익단체들의 역할이 크다면,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압도적으로 국가의 역할이 크다. 굳이 구별하자면, 서유럽이 ‘민주적 CME’라면 한국은 ‘권위주의적 CME’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조율된 시장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기업의 자유를 일정하게 제약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공공선 달성을 도모하는 식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적 공공선의 범주와 차원은 매우 다양할 것이나, 그중에서도 놓칠수 없는 것은 바로 개인들의 사회적 시민권 보장, 즉 사회적 존엄권 향유다.

전통적으로 복지가 저발전된 상태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고용을 사회적 존엄 향유의 핵심적인 매개체로 활용해 왔다. 그를 위해 고용주는 자신들의 해고권을 제약당해 왔고, 그것은 국가에 의해 강제된 사회계약적인 성격을 지녔다.

스칸디나비아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누군가 실업상태가 돼도 아무도 그것을 개인만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는 그가 일을 다시 하려고 마음먹으면, 최대한 지원하고 후원하며 케어(care)해 주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반면 개발독재 시절 고도성장을 향유하는 가운데 국가가 정책 목표로 완전고용 달성을 추구하면서 실업을 죄악시하고 사회복지를 억눌러 왔던 한국에서 고용은 그 자체로 복지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실업보험 제도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알다시피 고용 상태에서 누군가 누리는 사회적 시민권 회복을 위한 기제로 작동하기에 그 역량은 턱없이 모자라다.

게다가 한국은 이미 90년대 말 정리해고를 도입하는 등 노동시장 유연화를 단행하면서, 이미 중산층 붕괴와 사회적 양극화 도래를 경험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에 부조응하는 조기정년의 만연, 노령빈곤의 심각화, 청년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의 부족까지 거기에서 파생된 부작용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저성장 문제로만 이야기되기 어렵다. 정리해고·비정규직·아웃소싱 등 기업이 고용비용을 줄이기 위해 시도하는 각종 제도적 기회들이 인정되면서 초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기업의 해고권을 강화시키겠다면 그것이 초래할 사회적 결과는 어떠할까.

해고제도의 합리적 정비는 분명 중요하다. 다만 우리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그것이 초래할 사회적 영향력은 어떠한지에 대해 헤아려야 하고, 그 부작용을 제어할 준비기제를 동시에 갖춰야 한다. 그러한 전제조건은 하루 아침에 마련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해고할 자유를 더 부여하겠다면 해고당하는 이가 침해당할, 사회적으로 존엄하게 존재할 권리를 보장하는 방안을 반드시 같이 논의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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