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민주노총 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 위원장

1965년 열여덟 꽃다운 시절부터 학성모직·대한모방 등에서 시작된 어느 여성 노동자의 삶. 전두환 정권에 의해 노조가 파괴된 1982년 9월27일을 잊지 않고 모임을 갖는 원풍모방노조(전국섬유노조 원풍모방지부) 부지부장. 1980년 사회정화 조치로 해고·수배되고,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며 전국에 취직도 할 수 없게 블렉리스트가 배포돼 35년간 해고자 생활을 한 전노협 지도위원·민주노총 지도위원 박순희.

학교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열여덟 살 소녀는 노동자가 돼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서 노동법을 공부하고 JOC남부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70년 11월13일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접한다. 추모미사도 하고 이듬해 2월께 이소선 어머니와 바보회, 전태일 열사 친구들을 연합회에서 만난 후 수녀원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녀가 되는 대신 돈보스코센터로 들어가 생활하며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서강대산업문제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았고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수녀님들과 구로공단에 전세방을 얻어 공동체를 꾸렸다. 이때 섬유업계 최초로 민주노조가 건설된 원풍모방의 전신 한국모방에 입사해 노조 부지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엄혹했던 70년대 노동운동은 원풍모방을 시작으로 불붙은 민주노조 건설이 반도상사·동일방직으로 번져 나갔고 YH무역으로 이어졌다. 짧았던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신군부가 민주노조를 다 파괴했을 때에도 원풍모방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정화조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노동운동 탄압으로 결국 회사에서 해고된다. 해고장에는 어이없게도 "박순희 동지 너무 안타깝지만 섬유노조 본부로부터 조합원 자격이 박탈되어 종업원 자격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풍노조는 집행부가 몇 번 바뀌면서도 민주노조를 지켜 냈어. 그러니까 82년 9월27일, 어용방송 앞세우고 노조를 쳐들어왔지. 완강하게 싸우며 3박4일을 버텼어. 죽을 수는 있어도 니들에게 사표를 낼 수는 없다고. 800여명 남은 조합원들이 10월1일까지 현장에 남았는데 물 뿌리고 구사대와 공권력을 동원해 하나씩 다 떼어 내 가지고 난지도에다 갖다 버렸지. 우리는 그때 다 죽었더랬어. 나는 그때 제3자 개입금지법, 이게 이웃사랑 금지법인데 그걸로 잡혀가서 83년도에 나왔어.” 원풍모방에서는 82년에 559명이 한꺼번에 해고되는 등 80년부터 82년까지 노동계 정화조치로 600여명이 해고됐다.

감옥에서 출소한 후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가톨릭노동사목 일을 시작했다. 당시 익산경찰서는 서울에서 '왕빨갱이'가 내려왔다며 총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볍씨가 못자리에서 자라 논으로 모내기 되듯이 우리도 모내기를 해야 한다던 평소의 주장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전북 전주·익산·군산에서 자리가 잡히자 후배들에게 활동을 맡기고 89년부터 대전 대화동 공단지역에 '샘골어린이놀이방'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 또한 요시찰 대상으로 주목받게 됐다. 충노협 중심 활동으로 노동자 가족모임을 이어 나갔다. 노동자 밀집지역에 방 하나 얻어 시작한 게 가톨릭노동사목이다. 전국 24군데, 사북·태백까지 상담소가 있었다. 전노협 건설 전에 노동사목 실무자들이 전국에서 노동자 교육을 진행하며 맹활약했다. 박순희 아녜스는 그 시절 활동에 대한 회한을 이렇게 토로한다.

“1988년 노동자대회, 해방 직후에 있었던 전평 노동자대회 이후 처음이었잖아? 연세대에서 전국 노동자들이 모여 대회를 하구 마포대교를 지나 국회까지 행진을 했어. 마포대교를 건너다 감회가 새롭더라고. 70년대 민주노조를 하다가 빨갱이로 좌경용공으로 몰린 해고자들이 중간쯤에 섰어. 그때 정말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여기까지 살아온 것도 기적이라는 얘기를 했어.”

필자가 2002년 명동성당 천막에서 들었던 70년대 투쟁 이야기는 고통스런 나날을 견디는 데 큰 힘이 됐다. 뿐만 아니라 명동성당을 침탈하려는 경찰들을 향해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몸을 날리고, 일급수배자에게 퇴거를 압박하는 신도회를 향해 호통을 치던 노동운동의 대선배는 감동 그 자체였다. 전력산업 민영화 저지투쟁을 위해 명동성당에서 4개월간 버텨 내는 동안 박순희 아녜스와 고마운 신도들, 그리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의 고마움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오랜 해고생활 와중에 2004년 12월29일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우성모직(옛 원풍모방)에 복직권고안을 내기도 했다. 2001년 해고노동자들이 낸 민주화운동 명예회복과 보상신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해고자들은 2005년 4월14일 23년 만에 공장 앞에서 민주화운동 희생자인 자신들의 원직복직을 요구했다. 당연한 요구였다.

박순희 아녜스의 노동자 세상을 향한 꿈과 도전은 지금도 투쟁 현장에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노협 지도위원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를 역임하고, 활동반경이 노동과 함께 반전평화운동으로 넓어진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 칠순을 바라보면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후 남긴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선언을 몸소 실천하는 선한 싸움꾼 박순희 아녜스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민주노총 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 위원장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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