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씨의 손.

이달 3일 서울시청 인근에서 만난 중국국적동포 A(61)씨. 그는 손가락 지문이 흐릿했다. 공항에서 지문이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뭉개지고 닳았다. 지문은 한국에서 겪은 8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한국에 들어온 뒤 쉬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지문이 없다고요? 일만 했으니까 그렇죠. 가족에게 돈 보내고, 영주권 따고, 생활도 하고…."

A씨는 간병인이다. 아니 얼마 전까지 간병인이었다. 1년 넘게 일했던 병원에서 올해 6월 이유도 듣지 못한 채 해고를 당했다. 같은달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게 잘린 원인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혹시 수술 탓에 일을 못하게 될까 두려워 "업무에 지장이 없다"는 진단서까지 따로 받아 제출했지만 병원은 가차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24시간 병원에 상주, 사실상 노예노동

A씨는 2007년 12월 혈혈단신 한국에 왔다. 방문비자로 취업이 가능하고 나이 든 여성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은 식당 아니면 간병인이었다. 함바집(건설현장 식당)에서 일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일이 고됐다. 식당이 문을 닫는 설날에는 낯선 여관방에서 잤다.

8개월간 일하던 식당을 그만두고 간병인 일을 시작했다. 명절에도 병원은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일이 끊기지 않겠다는 생각에 기대가 컸다. 돈이 필요했던 A씨는 간병인 자리를 찾으려 생활정보지와 인력소개소를 뒤졌다. 때론 인맥도 동원했다.

A씨는 중소병원에서 환자 한 명을 돌보는 일대일 간병인도 했고, 자격증을 딴 뒤에는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로도 일했다. 하루에 3시간도 못 자고 환자를 돌볼 때가 많았다. 환자 여러 명을 전담하는 공동간병인을 하기도 했다. 공동간병인은 흔치 않은 근무형태인데, 대개 병원측이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간병인 소개업체를 운영한다는 한 환자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H라는 간병인 소개업체 사장이었다. H업체에서 소개받은 곳이 경기도 소재 관절전문 S병원이었다. S병원은 같은해 5월 A씨를 5층 병동 '24시간 공동간병인'으로 배치했다. 업무확인서에 구체적 근무시간과 업무내용을 지정했다.

개별 간병인들은 환자와 맺은 계약에 따라 며칠, 길게는 몇 달간 일한다. 상황에 따라 가족과 교대하거나 주말 동안 귀가해 쉴 수도 있다. 그러나 A씨는 S병원에서 일한 1년 내내 병원에 상주했다. 평일 근무시간은 오전 6시50분부터 밤 9시까지였다. 휴게시간은 세 차례 식사시간을 포함해 길어야 2시간밖에 안 됐다. 대부분 병원에서 잠을 잤다. 집에 갈 수 있는 시간은 토요일 저녁 6시 이후부터 일요일 낮 12시까지로, 1주일에 24시간도 안 됐다. 나머지 시간에 병원을 나가려면 간호사 허가를 받아야 했다. 평일은 매일 14시간씩, 주말에는 8~10시간씩 일한 셈이다.

쉴 공간도 없었다. S병원은 10층 높이 사무용빌딩 4~6층을 임대해 사용했다. 5층 병동에는 물리치료실과 간호사 스테이션, 1~6인실 병실이 들어차 있는데, 사람을 피해 따로 쉴 만한 여유공간이 없었다.

잠은 주로 병동 복도에 놓인 환자 이송용 침대에서 잤다. 운이 좋으면 가끔 빈 환자침대를 이용했다. 병원측이 처음 제공한 잠자리는 3층 직원식당이었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추웠다. 새벽 2시면 식재료가 배송되고 새벽 5시면 식당 직원들이 출근하는 통에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소연 끝에 겨우 5층에서 자는 것을 허락받았다.

무허가 파견업체서 200만원 받고 월 350시간 일해

간병인은 파견이 허용된 '개인보호 및 관련 종사자의 업무'에 속한다. 하지만 A씨가 한 일은 파견이 허용된 개인 간병업무로 보기 어렵다. A씨가 돌봐야 할 환자는 5층 병동 31병상 전체였다. 매일 환자들의 혈액·소변검체 혹은 퇴원서류를 각각 검사실·원무과에 전달했다. 수시로 간호사 휴게실과 환자 휴게공간·병실 침상을 청소했다. 간호사 지시에 따라 환자 재활운동을 보조하거나 수술환자를 이송했고, 수술실에서 쓰는 소독물품도 정리했다. 심지어 복도 정수기와 병실 냉장고·가습기 관리부터 날짜가 지난 달력으로 메모지를 만드는 업무까지 허드렛일은 도맡아 했다.

간호사 업무를 지원하는 일이어서 간호사의 지시를 받았다. 명목은 공동간병인이었지만 다른 업무량이 상당히 많아 개별 환자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간병이 필요한 환자들의 경우 공동간병인 A씨 대신 별도의 간병인을 불렀다. 병원측이 직원이 해야 할 일을 불법파견으로 해결한 것이다.

병원측은 A씨의 급여를 개별 간병인처럼 하루 7만원으로 계산해 H업체에 지급했다. H업체는 사업소득세와 직업소개 관련 협회비 6만원을 공제한 금액을 매월 A씨 통장에 입금했다. 집에도 못 가고 한 달 350시간을 일한 A씨의 월급은 200만원 남짓에 머물렀다. 시간당 5천714원으로 올해 최저임금(5천580원)을 밑돈다.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올해 3월 A씨는 H업체에 4대 보험 가입을 요구했다. "변호사에게 물어보겠다"던 H업체는 5월 A씨의 월급에서 20만원을 떼어 갔다. S병원 요구로 간병인 배상책임보험에 들었다고 했다. 괘씸죄인지, 정말 보험료로 들어간 것인지 A씨는 알 길이 없다.

"TV에서 간접고용에 대한 뉴스를 보고 나도 저기 속한다는 생각이 들어 4대 보험만큼은 좀 들어 달라고 했는데. 병원도 업체도 서로 모른다고 하고…. 너무 속상했어요."

설상가상으로 같은달 A씨는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간호부장에게 치료를 위해 10일만 쉬게 해 달라고 했고, 한 달 정도 쉬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간호부장은 한 달 후 병원에 돌아온 A씨에게 "따로 들은 것 없느냐, 일단 집에서 기다려 보라"고 했다. H업체는 "왜 한 달이나 쉬었느냐"며 면박만 줬다. 그는 그렇게 잘렸다.

노동부, 진정사건 6개월째 '만지작'

해고된 A씨는 분했다. 올해 7월 서울노동권익센터 도움을 받아 고용노동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안양지청에 업체·병원을 상대로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위반 혐의로 진정을 냈다. 미지급 퇴직금을 달라는 진정서도 제출했다. A씨의 업무가 파견 허용업무에 속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데다, H업체는 근로자파견사업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파견업체였다.

안양지청은 12월 말 현재까지 진정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있다. 안양지청은 8월에 A씨를 한 번 조사하고, 9월에 병원과 업체를 각각 한 번씩 조사했다. 범죄를 인지했다고 밝힌 것은 이달 중순으로, 진정을 접수한 지 5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담당 근로감독관은 "불법파견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고 범죄인지를 했다"며 "양측 업체를 추가 조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 A씨가 권리를 찾기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 지 모를 일이다. 근로감독관은 "업체가 단순 소개업을 했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일정이 또 지연되기 때문에 검찰 송치가 언제 될 지 모른다"고도 했다. 진정 처리가 늦은 이유에 대해서는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었고 근로감독관이 이 일만 담당하는 것도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안양지청은 A씨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업체 소속으로 일한 또 다른 간병인이 "퇴직금을 못 받았다"며 낸 체불임금 진정사건도 아직 처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현이 청주노동인권센터 사무처장은 "개별 간병인들에 대한 법 규정이나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보니 노동부가 유사한 진정이 이어질까 우려해 판단을 내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 사무처장은 "개별 간병인들이 아예 법·제도에서 배제된 상태인 만큼 민간이나 지역 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중국국적동포들의 경우 내국인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해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병원도, 업체도 간병인 불법 활용 '여전'

노동부가 뜸을 들이는 사이 제2의 피해자가 잇따르고 있다. 현재 S병원은 '24시간 무료간병인' 대신 포괄간호서비스를 도입했다. 환자는 개별 간병인을 따로 부를 수 있고, 병원측은 간병인 소개업체 4곳의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나눠 주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H업체 연락처도 거기에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H업체는 현재 S병원에는 간병인을 보내지 않고 있지만 영업을 중지하지는 않았다. 업계에 따르면 H업체는 인근 몇몇 병원과 제휴를 맺고 간병인을 보내고 있다. 안양지청은 이와 관련해 "A씨 진정이 처리되면 그 병원들이 있는 지역의 지청에도 처리 결과를 통보할 것"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A씨는 퇴직금을 제대로 받고, 병원에 직접고용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벌써 6개월째다. 가장 역할을 하다 해고된 터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이어 가는 A씨는 "다른 간병인들도 나랑 똑같이 부당한 일을 많이 겪고 있다"며 "그런 일이 없어지도록, 잘못이 제대로 처벌되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A씨의 하소연에 노동부는 어떤 답변을 내놓을까.
글·사진=윤성희 기자

사각지대 놓인 비공식 간병인력 9만명
전문가들 "정부는 가사노동 제도화 약속 지켜야"


간병노동이 법적 보호에서 배제되고 난립한 민간소개업체 중 일부가 중간착취·불법파견·인권침해를 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에 따라 의료·요양기관에 요양보호사로 고용된 간병인은 근로자 지위를 가진다. 그러나 대다수 간병인들은 민간 간병인협회나 직업소개소에서 알선·소개를 받는다. 이들은 환자와 개별계약을 하고, 가사사용인으로 분류되면서 근로자성이 부인된다.

2012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이 같은 비공식 간병인은 9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기술이나 자격을 요구하지 않다 보니 주로 저소득층 고령여성이 종사하고, 이주노동자 비중도 높다. 2015년 고용노동부 취약계층 고용서비스 실태조사에 따르면 간병 분야에서 일하는 외국인 비중은 42.4%다.

간병서비스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면서 간병산업 규모는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간병노동은 노동법이나 사회보장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는데, 이들을 악용하는 편법은 진화하고 있다. 그 속에서 취약한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처지로 내몰린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병노동을 공식화해 법적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그럼에도 정부 정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초 간병인을 포함한 비공식 가사노동을 제도화하는 내용의 가사서비스 이용 및 가사종사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해가 넘어가는 지금도 감감무소식이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돌봄지부 관계자는 "간병노동을 둘러싼 문제는 간병인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병원의 직접고용과 관리 같은 과제가 선행돼야 풀 수 있다"며 "정부는 공공서비스인 간병부문을 민간기관이 사익 추구를 위해 악용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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