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에는 시민호민관이라는 독특한 옴부즈맨 제도가 있다. 옴부즈맨 제도라는 게 일종의 민원조사관인데, 시흥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호민관이 상근하면서 독임제로 운영한다. 비상근에 합의제로 운영하는 다른 지자체 옴부즈맨 제도와는 권한·책임 수준이 비할 바가 아니다. 초대 시흥시 호민관을 지낸 임유씨는 “약자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그나마 균형추가 맞다”고 말한다. 그가 호민관 시절 보고 듣고 만난 시민들의 얘기를 <시민은 억울하다>(한울)는 책으로 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부 내용을 발췌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게재한다.<편집자>

장애인 차량임을 나타내는 표지 색깔은 두 종류다. 녹색과 황색. 그런데 황색 표지는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 주차가 가능한 반면 녹색 표지는 주차를 할 수 없다. 청각장애가 있는 노옹 한 분이 미처 이런 사실을 몰랐나 보다.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서 단속을 당했다며 노발대발이다.

밖이 시끄럽다. 상담실 유리벽은 귀 한 번 ‘쫑긋’으로 세상의 모든 비밀을 허락한다. 더구나 80줄에 이른 노인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으니, 작은 속삭임까지 들릴 수밖에. 개입의 타이밍을 놓쳐 사건의 전개를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인데, 10분쯤 지났을까 이제껏 상담을 담당했던 호민관실 공무원이 도움을 청한다. 고충민원이 성립하지 않을 것 같아 설득해서 돌려보내려는데 좀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단다. “이러다간 일이 더 커질 것 같다”라며 ‘사족’을 덧붙인다. 말마따나 ‘설득’만 남아 보여 가벼운 마음으로 상담실 문을 열어젖혔다.

분이 좀 가라앉았는지 노옹은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억울한 사연을 풀어놓는다. “사회복지과에서 호민관이 해결해 줄 거라고 해서 왔습니다.” 죽비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이럴까, 노옹에게는 절실한 문제일 텐데 그저 흥밋거리로만 생각하고 귀동냥에만 열중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게다가 시시비비라니. 호민관은 판관이 아니라 변호인이고 신문고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리를 고쳐 앉고 그의 얘기에 마음을 열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주고 자그마한 아파트에 혼자 삽니다. 그리고 청각장애(2급)가 있어 거동도 많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큰아들 명의로 된 소형 자동차를 장애인 차량으로 등록해 병원 갈 때 간혹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뜬금없이 주차위반 스티커가 집에 날아들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지라 할아버지는 불문곡직 한달음에 시청을 찾았다고 했다. “장애인이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 차를 세운 것도 죄가 됩니까? 저 사진에 나온 장애인 표지를 한번 보세요.” 할아버지는 단속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당당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할아버지, 저 스티커는 장애인이라는 표시에 불과합니다. 표지 가운데에 ‘주차 불가’라고 적혀 있네요.” 너무 매정하게 말을 했나 싶을 정도로 나의 답변은 물기가 없었다.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노옹의 얘기에 맞장구만 쳐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리 단정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옹의 한숨 소리가 뒤를 이었다. 득의양양했던 호기는 간데없이 순식간에 풀이 죽는 모습이 어째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렇다고 안 되는 걸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영 뒷맛이 찝찝했다. 잠시 적막이 흐른 뒤 노옹이 자리를 박찼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얘기에 그가 승복하는 줄 알았다.

“난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장애인 차량 표지가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나뉘어 있는지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왜 내가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 주차가 불가능한 녹색 표지를 받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호민관이 해결해 줄 수 없다면 소송할 수밖에요.”

노옹은 떠났지만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또 한 번 자책이 밀려들었다. ‘불과 몇 분 전 일인데 그새 죽비 소리를 잊다니, 구제불능이다.’ 여태 난, 정해진 법의 잣대로만 이번 사안을 재단하고 있었다. “황색이 아닌 표지로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 주차한 것은 불법이다!”만 반복하면서 말이다. 제도 개선을 고민하지도 않았고 스티커 발부를 철회하려는 노력 따윈 아예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는 장애인 차량 표지를 발급할 때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서의 주차 가능 여부를 충분하게 설명하도록 한다거나 장애등급 판정 기준(보건복지부 고시)의 ‘장애유형별 보행상 장애기준표’를 현실에 맞게 개정하도록 입법청원을 하는 것과 같은 제도개선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오랜 시간 같은 행위를 한 것으로 볼 때 착각이 분명하니 계도 차원에서 스티커 발부를 취소해 달라” 정도는 요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으니, 자책만이 유일한 위로였다. ‘그래 놓고도 네가 호민관이냐?’

그 후

노옹이 호민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간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런데 노옹은 여전히 시와 싸움(?) 중에 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서너 달쯤 지났을 무렵, 어쩐 일인지 노옹이 4만원을 납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은 돈은 낼 생각이 없어 보인단다. 소송 대신 ‘불복’을 택한 게 틀림없다고들 한다. 마음의 상처가 나으면 혹시 모를까.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장은 보행에 장애가 있는 자로부터 신청을 받은 경우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 주차가 가능함을 표시하는 장애인자동차표지를 발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장애인자동차표지가 부착되지 아니한 자동차를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 주차하여서는 아니 된다. 장애인자동차표지가 부착된 자동차에 보행에 장애가 있는 자가 탑승하지 아니한 경우에도 또한 같다.(제17조)

장애인자동차표지를 부착하지 아니하거나 장애인자동차표지가 부착된 자동차로서 보행에 장애가 있는 자가 탑승하지 아니한 자동차를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에 주차한 자는 과태료 10만원에 처한다.(시행령 별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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