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에는 시민호민관이라는 독특한 옴부즈맨 제도가 있다. 옴부즈맨 제도라는 게 일종의 민원조사관인데, 시흥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호민관이 상근하면서 독임제로 운영한다. 비상근에 합의제로 운영하는 다른 지자체 옴부즈맨 제도와는 권한·책임 수준이 비할 바가 아니다. 초대 시흥시 호민관을 지낸 임유씨는 “약자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그나마 균형추가 맞다”고 말한다. 그가 호민관 시절 보고 듣고 만난 시민들의 얘기를 <시민은 억울하다>(한울)는 책으로 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부 내용을 발췌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게재한다.<편집자>

"공인중개사의 속임수에 넘어가 문제가 있는 집을 샀다. 공인중개사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는 시가 나서서 불량한 공인중개사를 처벌해 달라 요구했지만 시는 묵묵부답이다. 이를 해결해 달라.” “공인중개사가 측량까지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도 시는 공인중개사의 업무 위반으로 판단해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부당하니 구제해 달라.” 극명하게 갈린 두 주장 속에서 호민관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중절모가 멋진 노신사가 부인을 대동하고 호민관을 찾았다.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는 폼이 여느 시골 노인들과는 노는(?) 물이 달라 보였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억울함이라는 것도 일반 시민들의 그것과 달랐다. 허가를 받지 못했거나 부당한 처분을 당한 게 아니라 시의 소극적 처분에 대한 불만이었는데, 그것도 “누군가를 징계하라”는 다소 이례적(?)인 요구였다. 그의 주장은 이랬다. “4층짜리 건물을 하나 샀는데, 알고 보니 불법 건물이었습니다. 용적률을 위반해 단속을 받을 경우 자칫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겠다 싶어 매매계약을 해제했는데 건물 주인이 계약금을 돌려줄 수 없다며 계약 파기의 잘못을 저에게 돌리지 뭡니까. 하는 수 없어 민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아직 재판 중입니다. 그런데 집주인보다 더 나쁜 사람이 집을 중개한 공인중개사입니다. 불법을 알고도 중개를 한 그 행태가 너무 괘씸해 시에 공인중개사를 처벌해 달라는 진정민원을 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변이 없습니다. 행정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가 스스로 밝힌 호민관을 찾은 이유였다.

공인중개사의 불법을 특정하기에는 법률(공인중개사법) 규정이 애매했고 누구를 징계하라는 얘기니 만큼 전후 맥락을 세심하게 살펴야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최대한 조심에 조심을 다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공인중개사들(매수인과 매도인 양측 중개인)이 호민관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법에서 정한 대로 성실, 정확하게 중개 업무에 임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손해(계약금을 떼이는)를 만회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민원인이 일방적으로 제기한 거짓 주장을 받아들여 시가 업무정지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저희로서는 행정처분의 사유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지혜

한쪽을 편들면 다른 한쪽이 그 결과에 영향을 받는 상황이 연출됐다. 노신사 말대로 공인중개사들을 징계하라고 시에 요구한다면(이미 예고장이 나갔다!) 공인중개사들은 당장 생계를 잃는다. 그러나 반대로 공인중개사들이 억울한 것 같다고 얘기하면 노신사의 분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를 한통속으로 몰지도 모를 일이다. 직진 아니면 후진, 우회로는 없어 보였다.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에 묘책이 떠올랐다. 양쪽 모두의 주장을 모두 인용하지 않고 조사를 종결하는 방안이었다. 더구나 분쟁의 뿌리랄 수 있는 매매계약 파기의 정당성에 대해 이미 재판이 진행 중에 있고 쟁점이 된 공인중개사법 조항 역시 해석의 여지가 많아 굳이 내가 나서서 논쟁거리를 보탤 이유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가 밝힌 조사 제외 사유다. 지금 읽어도 절묘하다.

“민원인은 매매계약 해제와 관련해 현재 매도인과 법정 소송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공인중개사의 불법행위가 동 해제를 야기했다고 주장하는 민원인 입장에서는 공인중개사 관할 관청인 시의 행정처분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행정처분의 적법성을 떠나 시의 소극적 처분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민원인의 주장 자체는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민원인의 고충민원 신청 이후, 위 공인중개사들도 시의 행정처분이 잘못됐다며 호민관에게 고충민원을 신청해 왔습니다. 이 또한 조례에서 정하고 있는 고충민원 신청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이를 반려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동일한 행정처분에 대해 상반된 주장이 제기된 것입니다. 호민관의 의견에 따라서는 일방의 권익이 침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더구나 행정처분을 결정함에 있어 시가 적용한 이른바 공인중개사법의 규정은 그 해석에 있어 다툼의 여지도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민원인께서 제출하신 고충민원은 시민호민관 운영에 관한 조례 제14조2항5호에 의거 ‘조사 제외’ 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습니다. 행정심판과 같은 다른 법적 구제 절차를 이용하시기를 권합니다. 이 점 넓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민원은 계속된다

노신사가 시청을 거의 매일 방문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와의 첫 만남 이후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우연히 민원실 공무원과 논쟁을 하고 있는 노신사를 발견했던 것인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누는지 끼어들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그렇잖아도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먼발치서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김 주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또 평온한 얼굴로 바뀌고 뭔가 격렬하게 논쟁을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다.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보고 다시 왔는데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족히 두어 시간은 지났을 텐데 아직까지 저러고 있다니, 김 주사 오늘 일 다 했네.”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시쳇말로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노신사는 집요했다. 철천지원수가 이보다 더할까. 그는 끊임없이 공인중개사를 공격했다. 민원의 단초가 됐던 ‘중개 대상물에 대한 확인, 설명 의무 위반’ 시비가 무위로(시의 고발 그리고 검찰의 무혐의 결정, 시의 행정심판 패소) 그치자 그는 다시 공인중개사들의 불법 영업 행태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자신의 경우와 비슷한 사례를 수집해 이를 제보하기도 하고 불법 중개보조원을 두고 있으니 현장 조사를 나가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했는데 그 공인중개사와 거래했던 건물주들이 대거 불법 건축물 소유자라는 죄명으로 수백 만원에 이르는 과태료와 이행강제금 등을 부과받는 일이 벌어졌다. 신고했는데 왜 현장에 나가보지 않느냐, 조사 결과는 언제 나오느냐, 처벌 수위가 왜 그렇게 약하냐 등등 노신사가 시를 상대로 제기한 민원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신사의 행동은 나로 인해 기인한 것만 같아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미안하고 또 후회되고 그랬던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분했으면 ‘너 죽어봐라’ 식의 대응을 지속하는 것일까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숨겨진 얘기가 있는 게 아닐까. 공인중개사들이 나쁜 사람이고 노신사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라면? 갑자기 지난 결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고 또 몇 달이 지났을까, 노신사를 대리했던 공인중개사가 나를 다시 찾았다. 이미 인용하지 않겠다고 한 사안을 다시 가져온 줄 알고 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또 그 문제입니까? 제가 맡을 수 없다고 이미 밝힌 것 같은데요.” 조기에 논쟁을 끝낼 요량으로 말문을 막아섰던 것인데, 잠시 눈시울을 붉히는가 싶더니 그가 이내 저간의 얘기를 풀어놓는다. “영업정지 3개월 처분을 받고 행정심판을 청구했던 얘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다행히도 얼마 전에 ‘시는 행정처분을 취소하라’는 결정을 받아냈습니다. 같은 사안으로 사법 당국에 고발까지 당했었는데요, 그것도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지라 축하한다는 인사만 간단하게 건넸던 것인데, 나의 인사가 계면쩍을 정도로 참으로 무심하게 그는 하던 얘기를 이어 갈 뿐이었다. 지쳐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시 공무원들이 제 사무실에 들이닥쳤습니다. 이런저런 과거 중개 서류들을 가져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 고객 상당수가 과태료나 이행강제금을 받았다는 겁니다. 불법적으로 건물을 증축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것도 들어서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듣고는 있었지만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넋두리로만 보였기 때문에 들어줄 뿐 달리 할 일이 없다고 이미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그랬던 것인데….

“최근에는 중개보조원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업정지 1개월 처분을 다시 받았습니다. 또 싸울까 하다 법을 어긴 거는 맞으니 그냥 접었습니다. 그래도 감형 기준에 해당된다고 해서(싸워서) 15일 정지로 처분이 낮아졌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양반입니다.” 그의 목소리 톤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저는 중개보조원을 신고하지 않은 죄밖에 없는데, 이제는 그 중개보조원에게 제가 명의를 빌려줬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중개업 등록취소라네요.” 등록취소, 이 정도면 죽으라는 얘기나 진배없었다. 얼핏 들어도 이중 처벌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를 밉본 사람은 노신사일 텐데 중립을 지켜야 할 시가 왜 이토록 가혹한 처분을 내렸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 집요한 민원 탓에 나중에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걸 수 있는 건 일단 다 걸고 보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조사가 필요해 보였다. 더구나 이번 사안은 노신사가 이해 당사자가 아니니 굳이 돌려보낼(인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청문이 예고돼 있었다. 이미 시는 공인중개사법 위반으로[제7조(자격증 대여 등의 금지) 및 제19조(중개사무소등록증 대여 등의 금지)] 민원인을 경찰에 고발까지 한 상태였다. 이중 처벌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담당 공무원은 이런저런 서류를 보여 주며 전혀 다른 사안이라고만 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등록취소 결정은 성급해 보였다. 하다못해 사법 당국의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공인중개사가 이긴 행정심판(3개월 영업정지)에서 상급 관청인 경기도조차 그 결정을 사법 당국의 결정이 날 때까지 미룬 전례가 있으니 이를 인용해도 될 듯싶었다. 이미 등록취소 예고 처분이 내려졌고 수사기관에 고발까지 이루어진 상황이어서 시와 처분의 적법성을 다투는 것은 구제의 실익도 없었다. 우회로를 선택했다. “사법 당국의 최종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위 처분을 유예할 것”을 청문 담당 변호사에게 요청하는 선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청문 담당 변호사가 호민관의 의견을 받아들여 “수사기관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처분을 유예할 것”을 주문했고 시는 변호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노신사가 다시 나를 찾았다.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호민관한테 부당한 일을 당하면 누구한테 구제를 받습니까.” 나의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겁박을 이어 갔다. “복무에 있어 공무원의 그것을 따르게 되어 있고 직무와 관련해 벌칙을 적용함에 있어 공무원으로 의제되는 점 등을 감안하면 호민관은 넓은 의미의 공무원 신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시에 호민관을 조사해 달라 요구할 생각입니다.”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다 싶었다. 그냥 듣고 넘기기에 나의 수양은 한참이나 부족했다. “이번 일과 어떤 관계가 있으신 거죠? 아무리 봐도 이해당사자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권한으로 제3자에 대한 고충민원 처리 결과까지 시비하는 겁니까. 그리고 제가 공무원인지 아닌지를 선생님께 답변 드릴 이유는 없지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명백히 민간인 신분입니다. 그리고 호민관 본연의 직무와 관련해서는 그 누구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더는 할 말이 없으니 자리를 좀 비켜 주시지요.”

싸늘한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의 얼굴은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그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나는 그 자리를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복기가 필요해서였다. 공인중개사의 고충을 인용하지 말았어야 했는가에 관해서만 판단하면 되는 것인데 갈피가 좀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답은 언제나 ‘인용’(민원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향했고, 적어도 양심에 거리낌은 없었다.

노신사가 나를 조사하라는 진정민원을 시에 제기했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가끔 스치는 감사실 공무원들 얼굴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읽는다. 그저 씩 웃을 뿐이다. 저들 편하게 해주려면 아무래도 조사라는 걸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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