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금융노조

"지점장이 회식할 때 '쟤는 빼'라고 한다든지, 은근슬쩍 회의시간에 '쟤 때문에 우리 지점이 어렵고 너희들이 힘들다'고 말한다."(A증권)

"공개적인 회의 자리에서 저성과자들에게 '월급을 축내고 있는 식충이'라는 말도 많이 했다."(B금융)

"실적을 못 채우면 지점장이 회의시간에 '어떤 친구는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냐', '그렇게 밥값도 못해서 살겠냐'며 인격 모독을 한다."(C증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힘든 게 원격지 발령이다. 아기 엄마이기도 한 직원에게 '너 일 똑바로 안 하면 다른 데로 보낸다. 이번에 저쪽에 한 명 남는데 너 가야겠다'는 식으로 말한다."(D생명보험)

'따돌림·모욕주기·업무 강도 강화·원격지 발령·실적 압박·급여 삭감·성과급제·저성과자 교육….'

25일 공개된 '사무금융 노동자 직장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확인한 증권·생명보험·손해보험 등 제2금융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직장내 괴롭힘 종류다. 직장내 괴롭힘은 구조조정이나 비정규직 고용·성과주의 같은 기업의 경영방침에 따라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무금융노조 산하 68개 지부 3만여명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지난 6월 벌인 설문조사와 8~10월 진행한 11개 사업장 간부·조합원 심층면접 결과가 실태조사 보고서에 담겼다. 노조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인권운동사랑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한국비정규노동센터, KT새노조, 이인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실태조사 보고회를 열고 조사 내용을 발표했다.

◇욕설·모욕·업무배제에 기합까지=설문조사 응답자 3천65명의 답변을 분석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8.75%(1천209명)가 직장내 괴롭힘을 한 번 이상 경험했다. 주 1회 이상(267명), 거의 매일(130명) 겪는다는 노동자도 적지 않았다.

괴롭힘의 구체적 경험을 물었더니,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나 기한이 촉박한 업무를 받거나(830명), 능력이나 경험과 동떨어진 업무를 배당받고(498명), 업무 관련 주요 정보를 전달받지 못하는(368명) 등 업무상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619명), 욕설·비꼬기(572명), 고함·망신(560명), 성적 수치심(235명), 심지어 신체적 폭력이나 위협(102명)을 당하거나 오리걸음 같은 기합(23명)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노동자 23%(513명)는 정당하지 않은 인사조치를 받았고, 복지혜택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압력(20.2%)이나 부서이동·퇴사를 강요(14.8%)받았다. 성과급을 적게 지급하거나 승진에서 불이익(3.46%)을 당하기도 했다.

◇"기업 경영정책 따라 괴롭힘 증가"=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구조조정이나 비정규직 고용 증가, 경쟁과 성과주의 심화 같은 환경 변화에 따라 괴롭힘 경험이 증가한 점이 주목된다"며 "노동환경 악화와 고용불안이 괴롭힘을 부추기고 있고, 경쟁도가 높거나 성과주의 경영이 이뤄질 때 괴롭힘이 증가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송곳>에서 푸르미마트 경영진이 구조조정을 하기 위해 과장들에게 '직원들을 괴롭혀서 나가게 하라'고 지시한 것처럼 직장내 괴롭힘이 기업이 경영방침에 따라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얘기다.

그러나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이 문제를 '회사의 경영정책'(23.9%)으로 보기보다는 '가해자의 인성 문제'(41.8%)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노동자들을 심층면접한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과)는 "고용불안정이 심해지면서 불안감이 높아지고, 괴롭힘에 대한 인식을 무디게 하고 있다"며 "노동자들은 실적 압박은 받지만 그나마 임금이라도 제대로 받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직장내 괴롭힘의 핵심 원인 중 하나인 구조조정과 희망퇴직에 대해 노동자들은 '누군가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고연령자나 저성과자의 퇴직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경쟁과 실적 압박, 고용불안정이 심화되면서 노동자들이 기업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서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괴롭힘 막을 제도 없는데 저성과자 해고제 폭탄될 것"=직장내 괴롭힘을 제도적으로 막을 수는 없을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감독이나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 직장내 괴롭힘을 규율하는 법이나 제도도 마련돼 있지 않다.

서선영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는 "반드시 법이 아니더라도 가이드라인을 만들거나 모범단협안을 배포하고 지자체는 지침과 조례로, 기업은 명문화된 정책 선언만으로도 괴롭힘을 막을 수 있다"며 "법 이외에도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성과자 해고제도'로 불리는 일반해고 기준 및 절차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차승현 변호사(사무금융노조 법률원)는 "저성과자 해고제도는 본질적으로 직장내 괴롭힘을 합법화해 주는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며 "경험 없는 업무로 배치전환하거나 주말 산행, 독후감 제출, 업무 미배치, 대기발령 같은 전형적인 직장내 괴롭힘 행위는 모두 '교정 기회를 줬다', '해고회피를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될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서선영 변호사도 "저성과자 해고가 도입되면 기업은 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누가 봐도 '번듯한' 저성과자로 만들려는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더욱 은밀하고 잔인한 괴롭힘이 행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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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직장내 괴롭힘, 외국에서는 벌금 물리고 구속

근로기준법 개정안 국회 환노위 계류 중

주요 선진국에서는 직장내 괴롭힘을 막는 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스웨덴은 1993년 '작업환경에 존재하는 폭력과 협박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에 관한 명령'과 '직장에서의 학대에 대한 조치에 관한 명령'을 통해 직장내 괴롭힘을 정의하고, 그런 행위가 발생한 경우 사용자가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영국은 직장안전보건법·고용권리법·가혹행위로부터의 보호에 관한 법률·성차별금지법·장애인차별금지법 등 다양한 법률로 직장내 괴롭힘을 방지하거나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있다. 예컨대 직장안전보건법은 직장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후생을 보장해야 하는 사용자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위반하면 벌금이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프랑스에서도 직장내 괴롭힘 처벌법이 있다. 프랑스 노동법은 직장내 괴롭힘에 관한 조항의 제목을 '정신적 괴롭힘'으로 규정했다. 가해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징계 의무와 함께 정신적 괴롭힘에 대해 1년 이하의 금고와 3천750유로의 벌금형이 부과된다.

벨기에는 2002년 직장내 괴롭힘을 방지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직장에 있어서 폭력·정신적 괴롭힘 또는 성적 괴롭힘으로부터의 보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독일은 산업안전보건법과 경영조직법에서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각종 괴롭힘 행위를 규제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에서는 최근 이인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직장내 괴롭힘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직장내 괴롭힘의 개념을 △의도와 적극성을 가지고 지속적·반복적으로 소외시키거나 괴롭히는 행위 △정당한 이유 없이 6개월 이상 업무에서 배제하는 행위 △불필요하거나 모순적인 업무지시를 반복하는 행위 △반복적으로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해 인격을 침해하는 행위 등으로 규정했다. 손해배상 책임과 피해 근로자 구제를 위해 가해자에게 입증책임을 지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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