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참 팍팍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도 먹을 것은 부족했지만 마음은 풍족했다. 요즘은 넘쳐나는 패스트푸드에도 마음이 참 배고픈 시대다. 30분에 한 명꼴로 자살하는 한국에서 이제 자살 뉴스는 각자 생계의 급급함에 비하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자살이 반복되는 해고 이후 벌어진 묻지마 살인, 직장에서 참았던 분노를 개인에게 폭발시키는 증오범죄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희망’퇴직을 종용받고 일자리라곤 비정규직뿐이며 ‘희망’은 보이지 않는 사회는 삶을 굶주리게 한다.

일하다 병 얻었는데 내가 비정상이라고?

정신병이라면 소문이라도 날까 쉬쉬하던 한국 사회에서도 언제부턴가 정신질환으로 인한 산업재해 신청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신질환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가 많거나 부당한 요구를 당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겪을 때 인간은 자존감에 손상을 입는다. 직장을 그만두자니 부양해야 할 가족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발목을 잡고, 버티자니 난관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좌절이 반복되다 보면 정신질환이 발병할 위험이 커진다.

그런데 이런 정신질환의 원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소위 업무 과정에서 사용자에게 ‘찍힌’ 경험을 가지고 있다. 대학병원에 행정사무직으로 20여년간 일해 왔던 그녀가 산재 신청을 위해 사무실에 왔을 때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직장내 괴롭힘을 당했던 흑역사를 오랫동안 들어 줘야 했다.

연구비로 아내의 해외여행 항공권을 구매하라는 병원장 지시에 맞서 규정에 어긋난다고 문제를 제기한 그녀가 겪은 보복은 4~5개월, 길면 1~2년 간격으로 계속 이 부서 저 부서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어야만 했다. 새로 간 부서마다 그녀에게 불공정하게 많은 과업을 요구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공개적인 모욕을 주거나 오히려 부서 내 일이 많을 때에는 아예 일을 주지 않고 회의에서도 제외시켰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그녀 대신 일이 몰리는 다른 노동자들도 그녀를 피곤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심지어 불공정한 상황에 분노하던 그녀 스스로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졌고 자존감을 손상당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일을 할 때 스스로 위축이 되고, 누가 무슨 말만 해도 혹 다른 악의가 있지는 않는지 의심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는 현재 또다시 대기발령 상태다. 이미 수개월의 대기발령 끝에 새로 배치된 외상센터, 그녀는 일을 새로 배워야 했지만 이번엔 정말 잘해 보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전산업무를 다 배우지도 못한 나흘째 만에 센터장으로부터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다. 센터장은 외상센터 중환자실 한가운데 그녀를 세워 놓고 환자의 보호자와 간병인·간호사·간호보조인·전문의와 전공의 등 20여명이 보는 앞에서 전산업무를 하기 싫어 눈이 아프다고 투덜거렸다거나 동료 직원들에게 자신이 엄마뻘이라고 위세를 부리며 일을 게을리했다는 등 근거 없는 비방을 들으며 모욕을 줬다. 그녀는 충격과 수치심으로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비정상적인 고혈압 증세로 두통이 심해져 오후에 조퇴를 했다. 센터장은 그녀를 불러 "당신만 고혈압 있냐, 나는 혈압이 더 높다,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중환자실에서 피 닦는 일이나 하라"면서 의식 잃은 피투성이 응급환자와 울고 있는 가족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피를 닦으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그만두든지 다른 부서로 가라며 수차례 공개적인 모욕을 당해야 했다. 간호대학 교수 자리를 제의받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녀는 지금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

괴롭혀서 쫓아내는 해고를 합법화하려는 나라

한국 사회에서 인권이라는 담론은 그리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특히 경영권 영역에서 노동인권을 말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직장 조직문화가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효율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직장에서 상명하복이라는 위계가 우선한다는 인식은 근로계약 내용이 아닌 부당한 지시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시하게 만들고 업무와 무관한 요구도 개인적 친분을 앞세워 가벼운 부탁으로 변질시킨다.

이는 부당한 요구를 하는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하찮게 여기는 행위다. 최근 정리해고와 희망퇴직 남발, 비정규직 증가로 인해 일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풍토, 돈만 주면 사람도 쉽게 쓰고 버리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직장문화를 더욱 강화한다.

사용자에게 찍히면 어떻게 노동자가 무능력한 왕따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사용자는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 저성과자로 만들 수 있는지 무궁무진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상시적인 구조조정이 만연한 일터에서 정말 많은 이들이 비정상적인 전환배치와 부당한 사용자의 업무지시, 집단 따돌림으로 고통받으며 외롭게 버티고 있다. 그러나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제대로 된 법적 규제는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정부는 저성과자 해고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겠다면서 노동개혁을 외치고 있다. 물정 모르는 어떤 학자는 해고의 자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사용자가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것이라면서, 성과를 핑계 삼아 무능력자로 만들고 자존감을 깎아내려 치욕적인 해고를 보장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들이민다. 몰상식을 상식으로 만들려는 박근혜 정부에게는 정신감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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