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에는 시민호민관이라는 독특한 옴부즈맨 제도가 있다. 옴부즈맨 제도라는 게 일종의 민원조사관인데, 시흥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호민관이 상근하면서 독임제로 운영한다. 비상근에 합의제로 운영하는 다른 지자체 옴부즈맨 제도와는 권한·책임 수준이 비할 바가 아니다. 초대 시흥시 호민관을 지낸 임유씨는 “약자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그나마 균형추가 맞다”고 말한다. 그가 호민관 시절 보고 듣고 만난 시민들의 얘기를 <시민은 억울하다>(한울)는 책으로 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부 내용을 발췌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게재한다.<편집자>

<계속 이어짐>
그럼 여기서 잠시 전원생활이 꿈이었던 김 부장의 사연을 통해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개발제한구역법)의 위용을 한번 살펴보자. 김 부장은 주말농장으로 쓸 요량으로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100평 남짓 크기의 밭떼기를 장만했다. 당시 2천만원이 들었으니 작지 않은 투자였다. 그런데 요즈음 정말이지 사는 재미가 나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땅 투기가 목적이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땅값이 형편없다. 어쩌다 동네 부동산에서 시세를 확인할라치면 속에서 열불이 인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환장할 일이 생겼다. 비만 오면 밭이 자꾸 침수가 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주변 땅이 전부 성토를 하는 바람에 자신의 땅만 낮게 돼 물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하소연도 해 봤지만 허사였고, 하는 수 없이 자신도 성토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거금을 들여 겨우 땅 높이를 맞춰 갈 무렵 난데없는 계고장 하나가 날아들었다. 당장 원상 복구하지 않으면 이행강제금을 부과하겠단다. 50센티미터까지는 개발제한구역이라도 허가 없이 성토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되는데’ 그걸 지키지 않았다나 뭐라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김 부장, 한걸음에 시청을 찾아 그럼 옆 땅은 어떻게 성토가 됐냐고 물었겠다. 하지만 물기 하나 없는 대답만이 날아들 뿐이다. “선생님은 누군가 신고를 해서 제가 확인한 것이니 법 위반이 맞지만 옆 땅이야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1년에 50센티미터씩 성토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이렇게 높았는지 말입니다.”

솔직히 김 부장의 경우는 억울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 40년이 넘도록 개발을 제한받아 온 사람들의 그 기막힌 사연들에 비해서는 말이다. “내 땅 갖고 내가 하겠다는데 왜 난리야” 하는 식의 똥배짱은 더는 이곳 개발제한구역에서 통하지 않으니 뭔가를 하고 싶거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땅이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되는 행운이 올 때까지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저 기다리거나 시청 공무원으로부터 구원의 ‘해석’을 얻어 내거나 할 일이다. 그렇게 한다면야, 요즈음 말로 “참 쉽죠~잉” 소리가 절로 나올 듯. 그게 싫다면, 화병을 각오하거나.

보전이냐 해제냐

세계 여러 나라는 예외 없이 한정된 토지를 잘 사용하기 위해 그 이용을 규제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헌법(제122조)에까지 이를 규정하고 있다. “국가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해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영국의 그린벨트와 우리의 개발제한구역이 이와 같은 토지 이용 규제의 단적인 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영국이 아직까지도 제도 존속에 대한 탄탄한 사회적 합의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는 합의는커녕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불만의 목소리만 더욱 커져가는 형국이다. 왜일까. 이름만 다를 뿐 실제는 별반 차이가 없는데 도대체 왜 평가가 갈리는 것인가. 영국의 그린벨트는 무차별적인 개발 규제보다 환경친화적인 개발을 유도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우리의 개발제한구역은 무조건적인 규제만을 강제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린벨트는 시민적 요구를 수용해 만들어진 제도지만 개발제한구역은 최소한의 동의 절차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면적 고찰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린벨트든 개발제한구역이든 성공의 핵심은 경제적 이익의 침해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영국은 쾌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중산층이 모여 사는 그린벨트 지역의 지가가 오히려 높다. 그린벨트를 반대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개발 이익을 100퍼센트 환수하는 제도를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개인의 토지소유권은 인정하면서 개발권은 국유화해 모든 토지의 개발행위는 국가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는 개발허가제를 도입했다) 이른바 형평성을 시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개발제한구역 외의 지역은 무한정 개발의 자유가 주어지지만(그로 인해 천문학적인 개발 이익이 사유화되지만) 개발제한구역은 금단의 땅이 돼서 땅값 상승은커녕 이런저런 이유로 정상적 이용마저 제약을 받는다. 이러니 실패할 수밖에. 한쪽은 오히려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데 다른 편은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껴야 한다니. 영국이 압승(?)을 거둔 이유다. 아무튼 영국은 그린벨트 주민의 대부분이 중산층으로서 자연 상태의 개방성을 선호한 탓에 최근의 그린벨트 훼손 추세에도 불구하고 제도 존속에 대한 시민적 동의가 여전히 견고하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다. 개발에 따른 이익만을 유일한 가치로 믿는 풍토에서 개발제한구역 지정은 곧 사형선고를 의미하는데, 더구나 사방천지 모든 곳이 개발 이익으로 이익을 얻고 있는데 얼마나 더 그들에게만 참으라고 할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이 점에 대해 정부는 대답해야 한다. 개발 이익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형평성만큼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남이 땅을 산 것이 제일 배가 아픈 법임에랴.

개발제한구역에 서린 눈물과 한을 알 리가 없는 몇몇 학자와 관료들이 만나 ‘개발제한구역제도개선협의회’를 만든 것이 1998년 일이다. 그들은 해제와 보전이라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며 개발제한구역 제도에 대한 몇 가지 원칙과 제도 운용 방향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주요 내용은 ① 지정 실효성이 낮은 도시권의 구역 전체를 해제하고 ② 존치되는 도시권 중에 보전 가치가 낮은 지역은 부분 조정(해제)하며 ③ 해제 지역은 관리를 철저히 해 난개발을 방지하고 ④ 해제로 인한 이익은 환수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정부의 해제 움직임과 때를 같이해 이른바 환경론자를 중심으로 ‘그린벨트 살리기 국민행동’이라는 시민단체가 결성됐는데, 그들은 앞서 개선협의회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① 전면 해제 유보 ② 부분 해제를 위한 환경영향평가 항목 보완 및 실태 조사 ③ 명백하게 불합리한 지역에 대한 해제 ④ 존치 지역 토지에 대해 우선순위에 따른 보상 ⑤ 해제 이익 환수와 투기 억제를 위한 대책의 철저한 집행 ⑥ 대표성과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는 위원회의 구성 ⑦ 국토에 대한 친환경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의 수립 등을 요구했다. 보상에 있어서도 원거주민과 지정 이후 토지 매입자에 대해 차등 적용할 것을 주장하며 개발에 따른 해제 이익을 환수해 개발제한구역을 생태 보전 구역으로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자고 주장했다. 참으로 공정하고 공평한 주장인 듯싶은데, 개발제한구역 주민들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질 얘기였다. 니들이 뭔데 남의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하느냐는 식의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우리의 고통으로 쾌적한 환경이라는 이익을 얻었다면 의당 고통 분담의 얘기가 나와야지 그 얘기는 쏙 빼고 마치 정의의 사도나 되는 양 우리 가슴에 대못을 박느냐며 쌍심지를 켜기도 했다. 분노한 개발제한구역 주민들은 마침내 ‘전국개발제한구역주민협회’를 구성했다. 개발제한구역의 전면적인 해제를 주장하고 만약 존치해야 한다면 현 시가로 보상할 것을 요구했음은 물론이다.

한편 1998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개발제한구역 해제의 도도한 흐름에 발맞춰 오랫동안 논란이 돼 왔던 개발제한구역 지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게 된다. 개발제한구역 지정이라는 제도 그 자체는 “토지재산권에 내재하는 사회적 기속성을 구체화한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합헌적인 규정이지만 구역지정으로 말미암아 일부 토지소유주에게 사회적 제약의 범위를 넘는 가혹한 부담이 발생하는 예외적인 경우에도 보상규정을 두지 않는 것은 위헌성이 있다”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제약의 범위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을 남긴 점은 아쉬운 대목이지만, 정부와 국민들에게 보상의 방법과 재원 마련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안겼다는 점에서 개발제한구역 제도로 인해 고통받은 구역 주민들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러한 개인의 이익 추구를 모두 만족시키지 못한다. 자원이 부족하거나 개인의 이익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는 존속을 위해서라도 개인의 양보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이 모여 법률이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개발제한구역은 환경 보존의 측면에서 각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초래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국토 환경적인 룰이다. 다시 말해 개발제한구역은 인간의 이기심에 따른 국토의 난개발을 막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지정 과정이 너무 비계획적이었던 데다가 보상 합의도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조치였기 때문에 지정의 선의(?)마저 의심받게 된 것이다. 모름지기 공익이 사회적 합의를 획득하려면 사익과의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함에도 지난 40년간 우리 정부는 피해자인 주민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양해를 구하기는커녕 양보와 희생만을 강요하고 심지어는 투기자 낙인까지 덧씌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더구나 이름도 살벌한(?) 개발제한구역으로 부르면서 말이다.

난 기본적으로 개발제한구역의 전면적 해제를 지지한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은 정부만 경계하면 될 일이라 믿기 때문이고, 자연보전은 이미 촘촘하게 엮여져 있는 다른 법률로도 충분히 지켜질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국가 안보는 군기와 군사력의 문제이지 개발제한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그럴 생각은 별로 없지만) 정말로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가치의 수호를 위해 개발제한구역의 존치가 필요하다 생각한다면, 재산권 행사가 제한됨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또한 나의 신념이다. 더는 못 줘도 최소한 시가로 보상은 이뤄져야 그들의 지난 세월의 반의반이라도 위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돈이 없어 못 하겠다면, 최소한 형평을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개발 이익 100퍼센트 환수 제도의 전면 시행 같은 것 말이다.

개발제한구역 같지 않은 개발제한구역이 천지다.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발제한구역 ‘훼손 지역’이다. 불법(?) 건축물의 온상이다. 축사를 개조한 공장이 부지기수고 농업용 비닐하우스는 검은 위장막으로 가려져 있다. 정부는 단속하고 주민은 숨기 바쁘다. 수천 만원의 이행강제금이 일상화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원상회복이 이뤄지리라 믿지 않는다. 심지어 정부마저도. 다만 그 속에 분노가 자라고 억울함만 무성할 뿐이다. 오늘도 단속과 원상복구가 숨바꼭질을 계속하는데, 정부는 여전히 개발제한구역은 유지돼야 하고 유지될 수 있다고 되뇌고 있다. 도대체 왜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하는지 난 당최 이해할 수 없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놔둔다고 이미 훼손된 지역이 갑자기 복구될 리 없는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푸는 것만이 정답이다. 산소를 공급하고 건강해지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면 복구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니.

개발제한구역이 지정된 지 40년이 지났다. 이미 용도가 다한 개발제한구역 방식만 붙들지 말고 다시 한 번 영국의 그린벨트로의 회귀를 고민해야 한다. 시민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녹지축으로서의 그린벨트, 더는 ‘제한’의 땅이 아니라 여가와 환경이 어우러진 ‘창조’의 공간 말이다. 개발제한구역이 아니라도 우리의 신천지를 여는 길은 이미 여럿이다. 의지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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