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정 기자
▲ 배혜정 기자

썰렁하다 못해 냉기가 흘렀다. 22일 오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15 손기정 평화 마라톤대회'에 참석한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과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김대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은 단상 위는 물론이고 VIP 천막 안에서도 그 흔한 귀엣말조차 나누지 않았다.

최근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두고 일방통행식 행보를 보이는 정부·여당과 "9·15 노사정 합의 파기로 간주하겠다"며 노사정위 탈퇴까지 경고한 한국노총의 긴장관계가 마라톤대회에서도 확인됐다. 김 위원장과 이 장관은 단상에는 나란히 섰지만 시선은 각자 다른 곳을 향했다.

냉기 흐른 노정 대표자들

올해 손기정 평화 마라톤대회는 손기정기념재단과 한국노총이 함께 '일터 안전문화 확산'을 주제로 개최했다. 한국노총 조합원과 일반시민 1만5천여명이 참가했다.

김동만 위원장은 이날 대회사를 통해 "이번 마라톤대회는 손기정 선수의 도전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고 나아가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안전과 평화의 의지를 담고자 한다"며 "안전한 일터,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길에 함께 호흡을 맞추고 힘 있게 뛰어가자"고 강조했다. 손기정기념재단 대표이사장인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은 "손기정 선수의 나라사랑 정신을 잊지 말고 민족혼과 애국혼을 계승·발전시키자"고 말했다.

이기권 노동부 장관도 축사를 했다. 그는 미리 배포한 자료집에서 노사정 대화를 마라톤에 비유하면서 "노사정이 1년여간의 노력 끝에 합심해 노사정 대타협을 이뤄 냈고, 금년 말까지 법·제도가 개선되고 다수 노사가 대타협 내용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막판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며 "노사정이 연말까지 최종 결승점을 통과할 수 있도록 관심 부탁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장관은 정작 마라톤대회 현장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인류에 보여 준 도전정신과 평화정신을 이어받아 노사, 근로자 간 협력과 화합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며 다소 밋밋한 축사로 가름했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 관계자는 "(한국노총이 노사정위 탈퇴까지 경고한) 지금 분위기에서 (자료집 내용대로) 말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김동만 위원장 "각서 써 준다는 걸 유치해서 안 받았는데"

한국노총은 지난 20일 기자회견에서 정부·여당이 노동개혁 입법을 강행할 경우 노사정위에서 탈퇴하겠다고 경고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대회 현장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다시 한 번 노동부·새누리당·노사정위원회에 대한 불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청년일자리 창출과 정규직·비정규직 간 차별해소라는 대의를 가지고 합의를 했는데, 저쪽(정부·여당)은 신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며 "새누리당 5대 입법이 마치 노사정 대타협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밀어붙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이인제 새누리당 노동시장선진화특별위원장이 한국노총과 합의되지 않으면 입법화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각서까지 써 주겠다는 걸 유치해서 안 받았는데"라고 얘기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김 위원장은 "노사정위도 스스로 위상을 제고하려면 정부·여당이 잘못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정확히 짚어 줘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마라톤대회 성황 … 1만5천여명 참가

노정 대표자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마라톤 참가자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조심! 조심! 코리아!" 함성 사이로 폭죽이 터지면서 코스별 마라토너들이 시간차를 두고 경기장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초겨울 차가운 날씨에도 러닝셔츠와 쇼트팬츠 차림으로 출발선에 선 42.195킬로미터 풀코스와 하프코스 도전자들은 전문마라토너 같았다.

반면 10킬로미터·5킬로미터 코스에 도전하는 그룹은 유모차를 끌거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대다수였다. 색색의 풍선을 들고 뛰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날 86세 양세호씨가 최고령자로 풀코스에 참가해 주목을 받았다. 풀코스 출발 전 국민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는 "땀이 충분히 날 때 페이스를 쭉 끌어올려야 다치지 않는다"며 "절대 오버페이스를 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경기장 안쪽 트랙을 따라 산별연맹별로 마련된 천막 안에서는 노조 간부들이 조합원과 가족에게 따뜻한 어묵탕과 컵라면, 도시락을 챙겨 주며 응원했다. 금융노조 우리은행지부는 경기장 입구에서 위비뱅크 마스코트인 위비 캐릭터와 함께 우리은행 민영화 촉구 캠페인을 벌였다. 박원춘 지부 위원장은 "조합원과 가족들의 건강도 챙기고, 민영화도 알려 내면 일석이조 아니겠냐"고 말했다.

안전보건공단이 경기장 안에 설치한 페이스페인팅·캐리커처·건강상담·안전보호구 전시 및 체험 부스는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공단 마스코트인 안젤이·보건이와 함께 즉석사진을 찍는 포토존에는 어린이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걸그룹과 가수 부활의 공연이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날 5킬로미터 구간을 30여분 만에 완주한 김동만 위원장은 땀을 비 오듯 쏟아 내며 "예전에는 10킬로미터는 가뿐하게 뛰었는데 요즘은 5킬로미터도 힘들다"고 혀를 내둘렀다. 김 위원장은 "매년 이렇게 뛰면서 내 건강이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지 테스트해 본다"고 말했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도 "평소에는 잘 안 뛰는데 오늘은 5킬로미터를 뛰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한남운수노조 조합원인 김용준(47)씨는 10킬로미터 구간을 49분 만에 끊었다. 김씨는 "처음으로 마라톤에 도전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며 "마라톤대회 주제가 안전인 만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잘 뛴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10킬로미터를 뛴 강훈중 한국노총 홍보선전본부장은 "모든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건강과 안전을 챙기며 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수진 의료산업노련 위원장은 "쉬엄쉬엄 걷다 뛰다 했다"며 "노동시장 구조개악 때문에 계속 심란했는데 오랜만에 조합원들과 함께 뛰고 도시락을 나눠 먹으니 마음이 풀리는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일반인 참가자 배미영(46)씨는 "힘들었지만 기분은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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