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에는 시민호민관이라는 독특한 옴부즈맨 제도가 있다. 옴부즈맨 제도라는 게 일종의 민원조사관인데, 시흥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호민관이 상근하면서 독임제로 운영한다. 비상근에 합의제로 운영하는 다른 지자체 옴부즈맨 제도와는 권한·책임 수준이 비할 바가 아니다. 초대 시흥시 호민관을 지낸 임유씨는 “약자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그나마 균형추가 맞다”고 말한다. 그가 호민관 시절 보고 듣고 만난 시민들의 얘기를 <시민은 억울하다>(한울)는 책으로 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부 내용을 발췌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게재한다.<편집자>

청소 일을 해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할머니가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지원이라도 없으면 노부부가 앉아서 굶을 판이다. 그러나 긴급구제를 하려 해도 조건이 맞지 않는다. 금융자산이 기준을 넘겼기 때문이다. 담당 공무원은 애를 태워 가며 방도를 찾아 헤매는데, 노옹은 만사가 못마땅하다. 자존심을 다쳐서다.

제1막

5월의 어느 날, 칠순을 한참 넘겼을 노옹과 함께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는 팔을 다치셨는지 깁스를 한 채로 물끄러미 노옹과 나를 번갈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대신 분노로 일그러진 붉은 낯빛을 한 노옹이 입을 열었다. “제 나이가 일흔넷입니다. 이 나이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내가 청소부로 일해서 근근이 먹고살고 있는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팔을 다쳤으니 꼼짝없이 굶게 생겼습니다.” 달리 도움을 받을 가족들은 있는지 물었다.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속내를 털어놓는다. “자식이 넷이나 되는데, 변변한 놈이 하나 없습니다. 다 지 먹고살기 바쁜지 부모가 굶는지 어떤지 관심조차 없어요. 오죽하면 이 나이 들어서까지 한 달 100만원 남짓하는 청소 일로 연명하고 있겠습니까.” 노옹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인데 나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은 하지 않으셨나 보죠?” 그 누구보다 우리나라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잘 안다는, 명색이 호민관의 질문치고는 한심했다. 부양가족이 넷이나 된다고 이미 말했는데도 말이다. “두 늙은이 사는 자그마한 빌라 한 채가 있는데 가격이 1억원 조금 넘습니다.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도 되니 마니 하는 판국에 언감생심 꿈이라도 꾸겠습니까.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요.” 노옹의 얘기는 그렇게, 한숨으로 시작됐다.

당장 끼니가 걱정이던 차에 시청에 가면 도와줄 거라는 말을 듣고 노옹은 불문곡직 전화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자신이 담당자라고 밝힌 공무원으로부터 긴급구제제도를 통하면 지원이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런저런 서류를 준비해서 시청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자격 요건이 안 돼 지원이 어렵겠습니다.” 자신이 진짜(?) 담당자라고 밝힌 공무원의 장황한 설명이 시작되려는 순간,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실컷 서류 준비해 왔더니 인제 와서 안 된다고? 내가 이 나라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데, 돈 몇 푼 가지고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느냐”며 분을 삭이지 못한 노옹은 그 길로 자리를 박찼다. 생활비를 보조받지 못한 사실보다 기만당한 것이 더 분하다고, 노옹은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연신 욕설을 퍼부어 댔다. 마치 인생의 전부가 무너져 내린 듯 절규했다. 노옹에게서 자존심은 ‘목숨’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담당 공무원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녀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긴급구제는 재산이나 부양가족 등의 조건 탓에 기초생활수급 자격은 없지만, 실직과 같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 생계가 곤란해진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예요. 그러나 이것도 자격 기준이 맞아야 지원이 가능합니다. 재산과 금융 기준이 그것인데 재산은 1억5000만원 이하, 금융자산은 300만원 이하 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통장에 350만원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구제가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제도를 잘 모르는 우리 신참이 지원이 가능하다고 섣불리 말한 점은 잘못입니다.” 얼마나 지독한 욕을 들었는지 그녀는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며칠만 참으면(?) 통신요금과 공과금이 빠져나갈 테니 300만원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데, 제 맘대로 해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몇 십만원만 우선 찾아 300만원 이하로 통장 잔고를 만든 다음에 신청하라고 조언(?)할 참이었습니다. 그 기준이라는 것이 ‘눈 가리고 아웅’ 식인지라 극단적으로 1억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신청 이전에 대부분을 인출한 후 기준(300만원) 이하를 증명하는 잔고증명서만 제출하면 긴급구제 대상이 되거든요.”

사실 공무원은 노인 부부의 딱한 사정을 그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어떡해서든지 돕겠다는 마음에 거의 모험에 가까운 결단(?)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본심을 알아주기는커녕 삿대질과 험한 욕설만 날아들었으니 억울할 법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무원은 집에까지 찾아가 잘못을(단언컨대, 자신의 실수가 아니다!) 사과하는 성의를 보였고 정성에 감복한 노옹은 마침내 분노를 거두었다.

제2막

호통 소리가 내 자리에까지 들렸다. 급한 용무를 처리하느라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함께 일하는 공무원이 민원 상담을 하다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좀 예의 바르게 말씀드리지 않고서는, 쯧쯧” 하고 마뜩잖은 표정으로 자리를 박찼다. 늘 그렇듯이, 위로와 맞장구 그리고 그 누군가를 ‘함께’ 비난하면서 우선 화를 진정시키는 일이 급선무라 판단했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깡마른 체구의 노인 한 분이 금방이라도 분노의 화살을 퍼부을 태세로 앉아 있었다. 그때 그분, 민원 해결의 모범 사례라며 자랑질(?)에 열을 올리게 했던 바로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가. 또 웬일로 오셨을까, 걱정이 앞섰다.

전후 사정을 듣고 나니 사건의 윤곽이 이내 그려졌다. 얼마 전 긴급구제제도를 통해 자금 지원을 받았던 노옹이 이번에도 지원이 가능할 것으로 믿고 안과 수술을 감행하면서 일이 터진 것이다. 노옹은 별생각 없이 친절한(?) 그 공무원 이름을 대고 “시가 갚아줄 것”이라며 수술대에 오르셨다고 한다. 나중에 의료비 청구를 받은 그 공무원은 “심사 과정이 필요한데 무작정 수술부터 받으면 어떡하느냐” 등등의 얘기를 던졌을 테고, 화가 난 노옹은 또다시 호민관을 방문해 억울함을 토로한 것인데…. 전후 사정을 모르는 우리 직원이 무심코 던진 입바른 소리 한마디가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할아버님, 이러시면 설사 의료비 지원이 결정되더라도 다시 환수 조치가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차 싶었겠지만 이미 말은 비수가 돼 할아버지의 자존심을 할퀴고 지나간 뒤였다. “뭣이라, 환수라고?”

자존심이 소리치다

사실 나는 지금도 노옹이 왜 그토록 분노했는지 모른다. 과연 자존심이 상할 만한 상황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이고 따뜻하게 응대한 것 같은데 도대체 왜? 노옹의 고백처럼 설사 자식들이 이제껏 부양을 외면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면 솔직히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서운함(?)은 딱 거기까지다. 자존심이란 게 원래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청객’ 비슷한 것이어서 ‘왜 지금’ 따위를 탓할 수 없는 놈이기도 하거니와 일흔이 넘도록 살아내 온 노옹의 그 기나긴 세월을 재단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토록 답답한 현실을 만든 책임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않으니….

사전은 자존심을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을 스스로 지키는 마음”으로 정의한다. 품위(위엄과 기품)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야 ‘자만과 거만’을 ‘자존심’인 양 생각하겠지만 어떤 이는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른바 ‘존심’을 지키느라 동정과 연민조차 뿌리친다. 자존심은 그런 것이다. 굶어 죽을망정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저 가슴속에 똬리 틀고 있는 마지막 남은 ‘무엇’이다. 그런데 이 자존심 강한 ‘자존심’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 작아지거나 없어진다. 세상 풍파에 찌들다 보면 자존심 따윈 집안 벽장 속에 숨겨야 할 무엇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정년까지 직장에 다니려면 지문이 닳도록 손바닥을 비벼야 한다거나 “자존심이 밥 먹여주느냐”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격언의 반열에까지 오르겠는가.

살면서 난, 자존심만큼 지키기가 어려운 것은 없다고 늘 생각해 왔다.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려면 우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처자식 굶기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돈이라는 놈은 늘 필요한데, 돈을 모으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고 그렇다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돈과 맞바꿀 수도 없으니 하는 말이다. 하기야 칠순의 노옹은 남들 다 버린다는 비루하기 그지없는 그 자존심을 지키느라 죄 없는 공무원을 죽일 놈(?)으로까지 만들었으니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지 않아도 팍팍한 인생살이 간신히 버티며 자존심 하나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데 평생을 바쳐 이 나라에 작은 초석 하나 놓고 살았다 자부하는 노옹에게 ‘자격 운운’과 ‘회수 타령’은 비수보다 더한 상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가난이라지만, 기왕지사 구제의 깃발을 높이 든 이상 ‘마지막 존심’까지 배려하는 따뜻한 행정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했다. 다행히도 노옹이 받았다는 안과 시술은 지원 대상이었다. 사건은 잘 마무리됐다. 노옹이 노여움을 풀지 않은 채 돌아갔다는 것만 빼고는.




[긴급복지지원법]

- 생계곤란 등의 위기상황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신속하게 지원함으로써 이들이 위기상황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제1조)

- “위기상황”이란 본인 또는 본인과 생계 및 주거를 같이하고 있는 가구구성원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로 인해 생계유지 등이 어렵게 된 것을 말한다. 1. 주 소득자가 사망·가출·행방불명, 구금시설에 수용되는 등의 사유로 소득을 상실한 경우 2. 중한 질병 또는 부상을 당한 경우 3. 가구구성원으로부터 방임 또는 유기되거나 학대 등을 당한 경우 4. 가정폭력을 당해 가구구성원과 함께 원만한 가정생활을 하기 곤란하거나 가구구성원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경우 5. 화재 등으로 인해 거주하는 주택 또는 건물에서 생활하기 곤란하게 된 경우 6. 그 밖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해 고시하는 사유가 발생한 경우(제2조)

‒ 금전 또는 현물 등의 직접지원의 종류 및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생계지원: 식료품비·의복비 등 생계유지에 필요한 비용 또는 현물 지원 나. 의료지원: 각종 검사 및 치료 등 의료서비스 지원 다. 주거지원: 임시거소 제공 또는 이에 해당하는 비용 지원 라. 사회복지시설 이용 지원: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른 사회복지시설 입소 또는 이용 서비스 제공이나 이에 필요한 비용 지원 마. 교육지원: 초·중·고등학생의 수업료·입학금·학교운영지원비 및 학용품비 등 필요한 비용 지원 바. 그 밖의 지원: 연료비나 그 밖에 위기상황의 극복에 필요한 비용 또는 현물 지원(제9조)

‒ 긴급지원은 1개월간의 생계유지 등에 필요한 지원으로 한다. 다만, 시장이 긴급지원대상자의 위기상황이 계속된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1개월씩 두 번의 범위에서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다만, 시장은 위 지원에도 불구하고 위기상황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제12조에 따른 긴급지원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원을 연장할 수 있다. 이 경우 지원은 총 6개월을 초과해서는 아니 된다.(제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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