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박정희(1917년 11월14일~79년 10월26일)를 직접 본 적 있다. 그가 중앙정보부장(KCIA) 총에 맞기 정확히 삼 년 전. 완연한 늦가을 날씨 늦은 오후 대통령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행사장으로 갔다. 행사는 끝났고, 사람들은 다른 도시로 가는 대통령을 환송하러 길가에 줄을 섰다. 행사장 입구에 도착하니, 갑자기 앞에 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검정색 리무진 뒤창이 열렸는데, 박정희가 얼굴을 내밀고 손을 슬로모션으로 흔들었다. 시월 말 늦은 오후 날씨는 음산했고 표정은 어두웠다. 1979년 10월27일 아침, 그가 총 맞아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공기는 맑았다. 학교 가면서 육군 소령의 아들과 위대한 지도자가 사라졌으니 북한이 남침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해 12월 서울을 무력으로 점령한 군대는 북한 ‘괴뢰군’이 아닌 전두환·노태우가 이끌던 대한민국 육군이었다. 알고 지내던 대학생이 독재자가 죽었으니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걸 듣곤 이 사람 이상하다 싶었다.

2011년 12월17일 사망한 김정일은 지방행 출장 열차에서 죽은 것으로 돼 있다. 군사파시즘 정권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이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면 실제 사인이 무엇이었든지 상관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 죽었다고 포장·조작됐을 것이다. 관동군 장교로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을 위해 싸운 박정희가 광복군 비밀요원으로 둔갑하고, 친일파 거두인 김무성의 아버지 김용주(1905년 7월~85년 1월, 70년 경총 초대 회장)가 민족운동가로 조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박정희가 동향 출신 후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1920년 3월~80년 5월)의 총에 맞아 죽던 시간, 나는 집에서 저녁밥을 먹으며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던 박정희를 보고 있었다. 충남 홍성에서 발원해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삽교천을 가로막는 방조제 완공식에 박정희가 당일 오전 참석했던 것이다. 흑백 필름이라 그랬을까. 검정색 양복을 입은 박정희는 침울해 보였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박정희도 서울 궁정동에 소재한 중앙정보부 안가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경호실장 차지철(1934년 11월~79년 10월), 김재규와 더불어 이십대 여자 두 명도 같이했다. 두 여자는 만 29살의 심수봉(1950년생), 22살의 신재순(1957년생)이었다. 박근혜(1952년 2월생)는 당시 27살이었다.

한국 최고의 음악 명문가에서 태어났다고 일컬어지는 심수봉(본명 심민경)은 1975년부터 청와대 연회에 나갔다고 한다. 명지대 경영학과에 들어가 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불렀지만 입상하진 못했다. 배철수·노사연·임백천이 같은 가요제 출신이다. 박정희는 연회 때마다 심수봉을 불렀다고 한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3학년이었던 신재순은 한 해 전 이미 재력가와 결혼한 유부녀였다. 박정희의 연회가 열린 궁정동의 동쪽엔 청와대가, 서쪽엔 자하문길이 있다. 박정희가 마지막으로 마신 술은 양주 시바스리갈 12년산이었는데,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1천673달러였다.

중앙정보부엔 박정희를 위해 젊은 여자를 구해 바치는 이른바 ‘채홍사’가 있었고, 여자들은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지던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청와대 경호실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을 한 뒤 접대법을 교육받았다.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두지 말며, 대통령이 먼저 말 걸기 전에 애교나 응석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북한의 기쁨조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중앙정보부의 채홍사가 박정희를 위해 선발한 여자들을 떠올리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날 그 연회에서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지 않았다면, 심수봉과 신재순도 200여명에 달했다는 ‘박정희의 여인들’처럼 정사가 아닌 야사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역사란 참 얄궂다.

79년 11월3일 국장이 열릴 때까지 모든 관공서 현관에는 박정희 사진이 걸렸고, 향불이 피워졌다. 하얀 국화가 놓였고, 국민은 자의타의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국장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고, 전국에 조의를 표하는 사이렌이 울렸다. 사이렌이 울릴 때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끼어선지 우울했다. 삼 년 전 본 박정희의 느낌이었다.

박정희가 올 때마다 도로에 아스팔트가 새로 깔렸다. 길가 집들은 낡고 더러운 지붕을 가리는 입간판을 설치하고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박정희는 늦가을에 주로 왔는데,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하는 작업은 초가을부터 시작됐다. 박정희가 친히 방문했다는 인근 동네엔 박정희 순수비가 세워졌다.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기리는 기념물을 볼 때마다 박정희가 생각나는데, 급기야 김정일이 죽던 2011년 박정희 동상이 구미에 세워졌다. 구미는 얼마 전 강간 혐의로 국회의원직을 내놓은 심학봉(1961년 4월생)을 국회의원으로 뽑은 지역이다.

국장날 텔레비전에 비친 서울시내엔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는 인파로 가득 찼다. 박정희가 좋아했다는 하얀 국화로 장식한 영구차가 지나자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1994년 김일성이 죽고 2011년 김정일이 죽었을 때 북한 텔레비전이 방송하던 장면을 보면서 박정희의 국장날이 떠올랐다.

헤겔이 그랬던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처음엔 비극으로 두 번짼 희극으로. 대통령이라는 공인이 아닌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인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박근혜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박정희 장례식과 김일성·김정일 장례식을 보면서도 했던 생각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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