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민 공인노무사(노무법인 필)

사용자에게는 인사재량권이 보장되지만 이것이 공정성·객관성·합리성을 상실한다면 더 이상 재량권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러한 인사재량권을 근거로 한 인사명령은 사용자의 권리남용으로 무효다.

이는 너무나도 명확한 원칙이지만 현실에서 사용자의 인사명령이 공정성·객관성·합리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경기도 소재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대학이 합병한 후 신입직원들을 공채로 선발해 왔다.

요즘 같은 청년실업 시기에 대학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은 많은 수의 청년취업자들이 희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다. 따라서 최종 선발된 직원들은 매우 뛰어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 기본이라는 토익점수는 모두 800점을 훌쩍 뛰어넘었고, 심지어 외국 의사면허를 가진 인원까지 신규선발된 인원에 포함돼 있었다.

대학은 이들과 2년의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했는데, 채용 당시부터 2년 후 평가를 통한 정규직 신분전환을 약속했다. 이어 2년이 지난 뒤 정규직 전환평가를 시행했다. 그리고 4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해고자들은 평가 결과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학의 정규직 전환평가 세부기준은 “근무평정 50점, 규정시험 20점, 직무발표 프레젠테이션 30점”으로 구성돼 있다. 70점 미만은 계약해지, 70점 이상이면 무기계약직, 80점 이상이면 정규직으로 신분전환을 공지한다. 그런데 2년간 업무내역이나 규정시험 평가 등을 아무리 따져 봐도 계약해지를 당할 점수가 아니었다.

탈락자 중 1명은 외국 의사면허 소지자였고, 또 다른 1명은 모범직원 표창 대상자로 선정되기까지 했던 우수한 인력이었다. 4명 모두 2년간 근태가 양호했고, 규정시험은 대부분 만점을 받았다. 결국 30점의 배점을 가지고 있는 '직무발표 프레젠테이션'에서 턱없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정규직 전환 대상자는 총 16명이었는데, 4명을 제외한 12명은 모두 80점 이상을 받았다. 즉 70~80점 사이의 무기계약직 전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평가가 제대로 진행됐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부족했다. 결국 정규직 전환평가의 공정성·합리성·객관성이 상실됐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문제는 당사자조차 평가 결과의 세부내용을 통보받지 못한 채 단순히 결과만을 안다는 점이었다. 일단 평가의 세부내용을 확보하기 위해 학교측에 평가 결과 공개를 요구하는 몇 차례의 내용증명을 보냈다. 학교측은 당연히 평가 결과를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 상태로 초심 구제신청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용자는 초심 과정이 끝날 때까지 구체적인 평가지표를 내놓지 않았다. 분명히 공채 때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고, 정규직 전환을 위한 평가까지 진행했는데도 이들에게 “정규직 전환에 대한 기대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초심 심문회의에서는 평가 결과를 정식 입증자료로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위원들에게만 잠깐 보여 주고 회수해 가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했다.

초심 지방노동위원회는 대상자 4명에 대한 계약해지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제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초심 판정서가 도착했지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사용자는 아직도 평가 결과를 공개하지 않은 채 재심 과정을 밟았고, 초심에서 했던 무의미한 주장을 지루하게 반복했다.

그러던 중 10월의 어느 월요일로 재심 심문회의 일정이 결정됐다. 그런데 대학측은 심문회의 직전인 금요일 오후 드디어 평가자료를 공개했다. 지루한 말싸움으로 진행되던 사건에서 명확한 판단기준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공개된 평가자료는 예상대로였다. 가장 배점이 큰 근무평정은 탈락자들과 합격자들의 차이가 크지 않았고, 규정시험 역시 대부분 만점이었다. 문제는 역시 '직무발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합격자들은 평균 15~19점을 받은 반면 해고자들은 겨우 5.6~6점을 받았을 뿐이었다. 심지어 PT를 심사한 심사위원수조차 각 대상자들마다 달랐다.

쟁점은 중노동위원회가 과연 이러한 평가 결과를 사용자 재량권으로 볼것이냐 아니냐였다. 결과적으로 중노위는 본 사건의 평가 결과를 인사권 남용으로 판단했다.

적어도 '재량'이라는 단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합리성은 갖춰야 한다. 특히 지금의 한국 사회처럼 고용이 불안한 사회에서 사용자의 인사재량권은 더더욱 신중해야 하고, 제한돼야 한다.

재심 심문회의 최후진술 시간에 해고자 중 1명은 “2년 동안 열심히 일한 청년들을 모교인 학교가 울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청년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일반해고 요건을 도입해 사용자의 인사재량권을 무한정으로 늘리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논리다.

더 이상 '재량'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사용자의 인사권이 청년들, 나아가 이 사회의 모든 노동자들을 울리지 않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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