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최악의 시기에 대형사고가 터졌다. 노사정 대타협은 가당찮은 표현이고 노동자들이 희생양이 된 역대 최악의 노사정 야합이다. 정부로선 최선의 시나리오대로 관철된 셈이다. 추석 밥상에서 국민의 입에 한국노총이 일방적으로 밀려 타결된 합의 내용이 애국적 결단으로 윤색돼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걱정스럽다. 조인식까지 한 마당에 돌이킬 방도도 마땅찮다. 국회에서 막아 내야 하겠지만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 전투력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총력투쟁이 가장 중요한 변수겠지만 만만찮아 보인다. 사면초가다.

가장 걱정스러운 건 노동조합 바깥의 노동자들이다.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미조직 노동자들이다. 사용자 주도로 업적과 성과를 빌미로 개별 해고의 칼날을 휘두르고, 취업규칙을 개정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임금체계를 바꿀 길이 열렸기 때문에 이들 보호장치 없는 노동자들은 언제라도 추풍낙엽 신세가 될지 모른다.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건 지금도 무척 어렵지만 이제부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에게 이번 노사정 합의는 뜬금없는 날벼락이다.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비정규직 의제를 포함시킬 이유는 없었다. 기간 연장과 파견 확대는 이미 대안이 될 수 없음이 명확해 정부도 칼집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그런데 이번 합의를 통해 비정규직 개악안이 합의 의제로 둔갑해 정기국회에 상정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국노총이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과오다. 엉뚱하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꼴이다. 상시·지속 업무 정규직 채용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청 사용자성 인정과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성 인정 등 핵심 비정규직 해법은 교섭테이블에서 사라졌다.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협상에서 대표적인 개악안이 부활했다.

비정규직이 봉인가.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 없이 노동시장 구조 개선은 요원하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때마다 강조되다 결국 들러리 의제처럼 취급되는 관행이 다시 볼썽사납게 되플이됐다. 지금도 100일 가까이 위험천만한 전광판 위에서 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면서 목숨 걸고 고공농성을 하는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최정명·한규협씨가 있다. 저 멀리 거제 대우조선해양 크레인 위에서 복직 합의사항 이행을 요구하며 160일 넘게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강병재씨도 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절실하고 합당한 요구마저 원·하청 사용자들의 부당한 탄압으로 가로막혀 있는 판국이다. 비정규직 현안 장기화와 정부의 반노동 정책이 기업주 입장이 관철된 노사정위원회 합의와 맞물려 있다.

극심한 내부 반발에도 박근혜 정부의 일방적인 위협에 백기투항한 한국노총은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었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계 전체가 궁지로 몰렸다. 평생 비정규직 제도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막을 방도는 미지수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온몸으로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1천만명이 넘는 비정규직, 1천1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 한 해 길거리로 쫓겨나는 해고자가 70만명인 절망의 나라에서 청년들은 7포 세대로 병들어 가고 있다. 시민사회 진영이 나서 노사정 야합 파기 범국민 불복종운동을 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상생과 공멸의 기로에 놓여 있는 만큼 문제투성이 노사정 합의를 규탄하고 바로잡을 비상한 실천행동에 돌입해야 한다.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가 오늘부터 시국농성에 돌입한다. 장그래들이 가장 고통받고 희생될 수밖에 없는 노사정 야합의 문제점을 국민에게 알리는 사회적 투쟁을 시작한다. 지도부 전원삭발로 투쟁의지를 다진 민주노총의 투쟁과 힘을 주고받으면서 한국노총 내의 야합 반대 노동자들도 합세할 수 있는 광장 역할을 할 것이다. 노노 분열과 세대 대립을 부추기면서 재벌 이익만을 대변해 온 정부와 새누리당의 저의를 심판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지금은 우리 사회의 최대 사회적 약자인 90% 미조직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위한 싸움에 너나없이 매진해야 한다. 기나긴 투쟁의 여정이 다시 시작됐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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