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협상 과정에서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문제에 밀려 상대적으로 덜 부각됐던 비정규직·노동시간 문제가 격렬한 장외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13일 한국노총과 정부·사용자가 잠정합의한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안)’이 노동시장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목돼 온 비정규직을 지금보다 확산하고, 노동시간을 늘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고용창출의 싹을 자르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양질의 일자리는 어디로=노사정 잠정합의 가운데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핵심 내용은 기간제 사용기간을 연장하고, 파견직 사용규제를 완화하는 것이다. 기간제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현재 32개로 제한돼 있는 파견 허용업종을 55세 이상 고령자와 고소득 전문직에 한해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이다.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정책이다. 이 장관은 노동부 근로기준국장 재직 당시 “비정규직법 시행 2년을 맞는 2009년 7월 비정규직 100만명이 해고 위협에 놓일 것”이라며 관련법 개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해고대란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고, 노동계가 이영희 전 장관을 직무유기와 허위사실 유포로 혐의로 고발하면서 노정 갈등이 깊어졌다. 이는 이명박 정권 시절 최악의 노동행정 중 하나로 꼽힌다.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은 노사정 합의문에 포함된 파견직 사용범위 확대와 만났을 때 더욱 위력적이다. 제조업처럼 현행법상 파견직 사용이 금지된 업종에 고령자를 대거 투입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최대 4년 범위 안에서 사용자가 원할 때 언제든 해당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 전체 연령대 노동자로 파견 사용범위가 확대되는 디딤돌이 될 가능성도 높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기간제·파견직 같은 비정규직 확대는 정규직 고용을 대체해 전체 일자리의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며 “비정규직 보호나 양질의 고용창출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놓친 최악의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강조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과 합의문 내용이 서로 배치된다는 설명이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합의문에 따르면 노사정이 추가논의를 거쳐 정기국회에서 입법화 과정을 밟는다는 것인데, 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는 한국노총이 정부·여당과 사용자의 노동법 개악 시도에 날개를 달아 준 꼴이 됐다”며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사정 협상의 제물이 돼 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저녁이 있는 삶'은 어디로=노사정 잠정합의안은 노동시간단축이라는 대의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 노동자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빼앗고, 경제성장 동력을 찾기 힘든 저성장 시대에 고용을 늘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법인 일자리 나누기의 가능성마저 제거했다.

합의문은 "휴일근로시간을 연장근로시간에 포함해 주당 최장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한다"며 현행 근로기준법 조항과 판례 경향을 재확인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업 규모별로 4년에 걸쳐 법정 근로시간을 준수하되, 1주일에 8시간의 특별연장근로를 4년간 허용하기로 했다. 4년이 지나면 특별연장근로가 자동으로 폐지되는 것도 아니다. 4년 뒤 특별연장근로 지속 여부를 재검토하기로 단서를 달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사용자들의 숙원사항이었던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확대(취업규칙 2주→1개월, 노사합의 3개월→6개월)하고, 노동시간 규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재량근로제 대상 업무를 확대하기로 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연구교수는 “청년고용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임금피크제가 아니라 노동시간단축이었는데 노사정 합의문을 보면 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노사정 합의문을 따르더라도 한국은 여전히 주당 노동시간이 60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 국가”라며 “유럽에서 주당 노동시간이 40시간 이하로 떨어졌을 때 보완책으로 도입된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이번 합의문에 포함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곽상신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은 “산업현장에서 물량에 따라 노동시간 유연성 확보가 필요한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법정 노동시간과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적용범위를 동시에 늘리는 방안은 노동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우려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