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어렵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항상 어려웠다. 하지만 왜 요즘 더 어려운지 (혹은 어렵게 느껴지는지) 생각해 본다. 노동조합운동 이야기다. 어제 노동조합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근로기준법이 법조문에 그치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오늘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지만 공허하다. 근기법이 실현되지 않는 사업장이 수두룩한데 비정규직 철폐를 외쳐 무엇하랴. 혹자는 그런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라고. 노동조합운동이 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고. 대기업-정규직 이기주의로 전락했다고.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정규직은 다 근기법을 지키는 사업장에서 일하는가. 대기업 노동자들은 다 근기법을 누리는가.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편 가르는 선동에 우리부터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건 아닌가.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은 것은 노조로 조직된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이 당의 정책 브레인들은 대기업-정규직 노조를 한국 사회의 문제아로 낙인찍었다. 그리고는 비정규직 당을 만들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나. 비정규직의 당은커녕 분당되고 당명 바뀌고 노동계급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자유-민족주의 당으로 변신했다가 부실선거와 자기분열로 내파했다.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져 나온 진보신당은 또 어땠나. 애초부터 비정규직 당을 지향했다. 지역조직을 비정규직 센터로 만들겠다며 자신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정도는 덜했지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동조합운동도 마찬가지다. 노동계급의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을 보호하고 조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우리 노동운동을 주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한국 노동조합은 정규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조합원이 정규직이라는 말이다. 이게 문제인가. 아니라고 본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률도 형편없다. 비정규직도 조직해야 하지만 정규직도 조직해야 한다. 비정규직이라고 다 같은 비정규직이 아니다. 대기업에 속한 비정규직은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사정이 나은 경우가 많다.

핵심은 대변(representation)이다. 조직의 토대를 이루는 회원들을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 능력이다. 회원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이익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한 회원들의 만족도와 보람을 높이는 것이다.

근기법을 읽어 보면 일터에서 삼금(三禁)을 실현하는 것이 이 법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폭력의 금지, 착취의 금지, 차별의 금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19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은 일터에서 이 과제에 실패했다. 그 결과 폭력·착취·차별은 비정규직을 넘어 정규직을, 중소기업을 넘어 대기업을, 민간부문을 넘어 공공부문에 두루 확산돼 있다.

노동조합운동은 비정규직을 제대로 조직하고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게 아니라 자기 기반인 정규직조차 제대로 조직하고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대립구도에 과도하게 집착해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이다. 그 결과 이제 10%의 조직노동자는 90%의 미조직 노동자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사회적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오히려 미조직·비정규 노동자가 질시하고 저주해야 하는 ‘노동귀족’으로 낙인찍혔다(사실 그 낙인의 절반은 노동운동 스스로 찍은 것이다). 이젠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낡은 프레임에 갇혀 우리 사회의 진짜 귀족들로부터 귀족으로 조롱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더 이상 정규직-비정규직 대립구도라는 낡은 틀에 갇혀 세상을 바라봐선 안 된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대립구도도 같은 맥락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을 공히 억누르는, 일터에 만연해 있는 폭력·착취·차별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비정규직 철폐라는 추상적인 구호와 운동 ‘알리바이’로는 현실을 한 치도 바꿀 수 없다. 일터를 틀어쥐고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구체적인 악들, 즉 폭력·착취·차별을 제대로 분석하고 이를 금지할 수 있는 실천적인 과제를 과학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한국 노동운동이 어리석은 점은 지금껏 자기가 애써 쌓아 온 자원과 역량은 무시하면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를 찾아 자꾸 헤맨다는 점이다.

비정규직의 노총이 되겠다? 정규직을 위한 노총부터 제대로 해 보시라. 그 출발점은 노조로 조직된 사업장부터 근기법을 실현하는 것이다. 열사 전태일의 숭고한 정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물두 살 청년이 죽어 가면서 엄마한테 부탁한 근기법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에게, 또 모든 사업장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전태일은 기억하면서 근기법은 잊어버린 한국 노동운동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