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수 변호사
(법무법인 시민)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이 산업재해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렸다. 2007년 3월 여성노동자 황유미씨가 사망하고 그녀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법적 구제절차를 밟기 시작한 후 2014년 8월 서울고등법원 판결로 산업재해임이 확정적으로 인정됐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대표기업이라는 삼성전자는 부인과 비협조와 은폐로 일관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리고 숨졌다. 시민사회·전문단체의 지원활동과 국제사회의 연대활동, 그리고 두 편의 영화 제작을 통한 여론 형성에 힘입어 결국 삼성전자가 책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관련 당사자(삼성전자·반올림·가족대책위원회) 간의 합의에 근거해 지난해 12월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에 의한 조정절차가 진행됐다. 조정위는 관련 당사자들이 합의해 공정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로 구성됐다. 조정위는 관련 당사자들의 의견을 폭넓게 듣고,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를 거쳐 7월23일 조정권고안을 제시했다. 조정위는 이 사안을 ‘개인적 사안’을 뛰어넘는 ‘사회적 사안’으로 보고, 당사자들이 합의한 보상·대책·사과라는 세 가지 의제에 대해 권고안을 내놓았다. 조정위는 또 사회적 과제 해결을 위한 기구로 공익법인 설립을 제안했다. 권고안의 주요 내용은 △삼성전자의 1천억원 기금 기부 △공익법인을 통한 보상 △공익법인이 임명한 옴부즈맨에 의해 점검이 가능한 안전체계 마련 △노동건강인권 선언을 포함하는 사회적 사과 등이다.

조정안에 대해 노동자측은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전반적인 취지에 공감해 약간의 수정의견을 가미한 수용의견을 밝혔다. 반면 삼성전자는 공익법인 설립이라는 근본 방안에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보상'과 '대책'의 실행과 점검은 삼성전자가 알아서 하겠다는 취지다. 조정위가 추가조정 의사를 밝혔음에도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는 신속한 보상을 핑계로 추가일정 연기를 요청했다. 삼성전자는 스스로 구성한 위원회에서 보상 대상, 보상 액수 등을 결정하겠다고 하는 바 그에 따를 경우 공정성과 신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공공적 차원의 견제장치가 없어 실효성도 불투명하다. 결국 보상과 대책 실행 과정에서 여전히 갑질을 하겠다는 것이다.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삼성이 보여 준 태도에 분노했던 시민들은 삼성이 조정위 조정절차를 수용했을 때 변화된 삼성을 기대했다. 조정위가 사회적 맥락을 중시하면서도 당사자들의 의사를 반영한 조정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분쟁해결의 새로운 모델이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판결에 의한 해결은 경직성과 협소성으로 한계가 있는데, 조정에 의한 해결은 이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은 조정위 권고안을 거부하고 있고, 사회 일각에서는 권고안이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침해한다고 매도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자들과 국가와 지역사회 및 시민들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따라서 삼성전자가 산재노동자들을 보상하고 산재예방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도 있다.

백혈병 문제는 삼성전자에게는 찬란한 빛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신뢰와 존경을 받는 기업이 될 수 없다. 삼성전자는 조정위 권고안을 수용함으로써 분쟁해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삼성전자가 대한민국의 대표기업이라면 말이다. 자신의 승낙하에 구성된 조정위의 권고안조차 팽개치는 기업이 어찌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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