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가히 노동이 충만한 곳이다. 무더위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이 계절의 온 사방에 노동이 가득 차 있다. 생산현장의 장시간 노동이 그 한 징표요, 신문 1면 아랫단을 차지한 정부의 ‘노동개혁’ 광고가 그 한 징표다. 대법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동 판결도, 고공에서 외치는 노동자들의 절규도 각 그 한 징표다. 박근혜 대통령의 ‘노동개혁’ 원포인트 대국민 담화는 그 압도적 징표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노동에 대한 입장을 강요받고 있다. 그런데 응답을 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시기에 이 땅에서 노동은 단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친 이래 우리는 ‘노동’을 구분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하지만 '이중노동시장'이라는 용어가 널리 유행하는 데다, 건성으로 보더라도 노동자들의 형편과 처지가 천양지차임을 알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 노동을 단일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정확한 구분은 올바른 판단의 선결적 과제다. 노점상을 단속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생계형과 사업형으로 구분하면 그 답을 찾기에 용이할 것이다. 보험을 들 때는 그 보험이 보장성인지 저축성인지를 우선 따져 봐야 할 것이고, 사업자와 관련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 사업자가 영세 자영업자인지 아니면 대기업 운영자인지를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노동자는 종래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구분돼 왔다. 누가 언제부터 이런 분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 산업구조 및 사회적 인식수준에 비춰 보면 이런 분류는 매우 유용한 분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분류는 당연히 의미가 있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유용한 분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화이트칼라인지 블루칼라인지에 따라 그 처우가 갈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남녀로 구분하는 것도 오래된 일이고 이는 지금도 많은 면에서 유용하지만 이 역시 노동자 처지와 관련해서는 일반적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 2000년대 들어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돼 왔다. 이런 구분은 정부 통계에도 포함돼 있고, 학술적 분석의 도구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에는 매우 다양한 고용형태(기간제·단시간·파견제·간접고용·특수고용 등)가 포괄돼 있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지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대기업 1차 벤더 간접고용 노동자와 중소영세 사업장 단시간 노동자의 처지는 천양지차다), 이런 구분이 항상 유용한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을 만능 열쇠로 생각하다가는 고용형태와 처지의 차이에 따른 세부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이런 구분도 제한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고 봐야 한다. 프리터(freeter : free + arbeiter)라는 용어 역시 특정 부류의 노동자를 지칭하는 용어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를 노동자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다.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의 구분 역시 노조운동적으로나 노동행정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노동자의 실태를 드러내는 유용한 구분으로 보기는 어렵다.

‘노동개혁’이 운위되는 지금 노동자는 어떻게 구분돼야 하는가. 노동을 하는 주된 목적이 임금을 수령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임금이 생존의 기반이 되고 분배의 최종적인 귀결 방식이라는 점에서, 임금의 액수로 노동자를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빈곤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여유 노동자)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유용하고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일반 노동자들은 경험적으로 또는 직관적으로 노동을 이리 구분하고 있다. 결국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분류인데, 상식과 유리된 이념과 행정이 이러한 구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수년 전부터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 노동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워킹 푸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저임금 노동자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빈곤 노동자는 비단 저임금 노동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고용불안에 노출되고, 부상과 질병의 높은 위험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까지 지칭하는 것이다.

빈곤 노동자는 우리 주변에 파견·임시직·노가다·잡부·경리아가씨·청소아줌마라는 이름으로 흔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미조직돼 있고, 자신들의 문제를 언어로 드러내는 것에 익숙지 않으며, 낙오자라는 자괴감과 열등자라는 경멸감에 사로잡혀 있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못 내고 있다. 이에 이들은 ‘노동개혁’에서조차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를 빈곤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로 구분한다는 것은 정책의 방향, 운동의 초점이 이들에게 유리한 것인지 아닌지를 묻겠다는 것이고 누가 이들의 편인지를 분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의 새벽을 갈망하는 자와 새벽의 노동을 감내하는 자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노동이 요란한 이 국면에 다시 새벽을 숙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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