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은회 기자

정부가 임금피크제 확산을 위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를 완화하겠다는 방침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노동법 전문가들의 주문이 잇따랐다.

매일노동뉴스와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공동주최로 8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에 관한 법률 토론회’에서 박종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60세 정년 시행에 따른 문제는 노사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사안”이라며 “정년 60세 의무규정 시행을 앞두고 ‘고령자 고용촉진’이라는 입법취지와 무관한 ‘청년일자리 창출’이라는 목적까지 연계해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용인하겠다는 정부 방침은 노사의 자율적 해결노력을 무위에 그치게 하거나, 노사가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임금피크제 시행, 강행규정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다음달 중으로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 없이 취업규칙 변경이 가능하도록 하는 ‘임금피크제 도입 지침(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예정이다. 근로기준법이 규정하고 있는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를 완화해 사용자들이 임금피크제를 손쉽게 도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발 벗고 나선 셈이다.

지난 5월28일 한국노동연구원 주최로 열릴 예정이었다가 노동계 반발로 무산된 임금체계 개편과 취업규칙 변경 공청회에서 노동부가 발표하려던 자료에 나타난 정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예컨대 정년 60세에 따른 임금피크제 등은 특별히 달리 볼 사정이 없는 한 불이익한 변경으로 보되 △입법취지와 기업의 재정 및 인력채용 부담을 고려할 때 임금피크제 도입 등 임금체계를 개편할 고도의 필요성이 인정되며 △근로자는 정년연장에 따른 사실상의 이익이 있으므로 사용자가 임금체계를 합리적으로 적정하게 설계하고 근로자 집단의 동의를 받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합의를 하지 못한 경우에는 △사회통념상 합리성 여부에 따라 변경된 취업규칙의 효력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는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에 따라 법정 정년이 60세로 늘어나는 만큼 임금피크제 시행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고령자고용법 제19조의2(정년연장에 따른 임금체계 개편 등)는 “정년을 연장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의 사업주와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를 말한다)은 그 사업 또는 사업장의 여건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 조항에 대해 박 교수는 “이를 강행규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사업 내에서 어떤 임금체계를 형성할 것인지는 노사 당사자가 합의로 결정할 일이지, 법률에서 특정한 임금체계를 택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현행 법질서 체계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권고규정에 불과한 조항을 근거로 정부가 임금피크제 도입을 강제하고, 이 과정에서 사용자 편의를 위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까지 완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뜻이다.

“취업규칙 사용자 일방 변경, 산업민주주의 훼손”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의 근거논리로 ‘사회통념상 합리성’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정년연장이라는 실익이 존재하므로 임금이 다소 줄어드는 것만을 이유로 취업규칙이 불이익하게 변경됐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박 교수는 “법원은 과거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인정되는 경우 불이익한 변경이 아닌 것으로 접근했다가, 현재는 불이익변경임을 전제로 하되 ‘과반수 동의’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예외적인 경우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사건에서 법원이 사용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토론자들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이론에 대해 거센 비판을 쏟아 냈다. 김선수 변호사(법무법인 시민)는 “사회통념상 합리성 이론은 근로기준법 제94조1항 단서와 같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에 대해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를 얻도록 하는 명문 규정 없이 일본에서 판례를 통해 확립됐는데, 일본은 2008년부터 시행한 노동계약법 제10조로 해당 이론을 명문화했다”며 “일본과 우리나라의 법률 규정과 입법 과정이 명백하게 다르므로 우리나라에서 사회통념상 합리성 이론을 도입하는 것은 사법권 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가령 변경된 취업규칙의 내용이 정당하더라도 법규범 제정권자인 근로자집단의 동의가 없는 경우에는 취업규칙으로서 법규범적 효력을 가질 수 없다”며 “이는 입법권자로서 국회가 제정하지 않은 것은 그 내용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법률로서 효력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내세워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산업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가치인 ‘대등한 공동결정’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변호사는 “취업규칙 변경 과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실질적인 노사대등결정 원칙’”이라며 “집단적 동의 없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것은 무효이고, 정부가 지침을 강행하면 산업현장에서 분쟁과 법적공방을 피할 수 없으며 이 과정에서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인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늙었다고 임금삭감, 사회통념에 반해”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도 “정부가 말하는 사회통념은 사용자들의 통념일 수는 있어도 사회일반인들의 통념일 수는 없다”며 정부의 편향적 자세를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사실 65세, 70세 이상으로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때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인정될 것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근로자가 근로계약상 근로를 정상적으로 제공할 수 있고 65세, 70세 이상이 돼도 근무에 지장이 없다면 해당 근로자가 임금을 삭감당해야 할 합리성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취업규칙 변경을 위한 사회통념상 합리성 이론의 현실적 필요성을 옹호하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이 다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회통념상 합리설 이론을 배제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기업운영상의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라며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근로조건이나 인사제도를 변경해야 할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는 등 취업규칙 변경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더라도 근로자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한 취업규칙 변경이 일체 불가능하다는 점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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