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재단 사람 상근활동가들이 인권중심 사람 2층 베란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최현모 사무처장, 정민석 활동가,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 강건한·여재희·난새 활동가. 정택용 사진가

"따르릉."
"인권재단 사람입니다."
"박래군 몇 살이냐!" "빨갱이들!"

다짜고짜 쏟아지는 욕설을 한두 번 듣는 게 아닌 듯 활동가 난새(39)씨의 얼굴이 '급' 심드렁해진다.

"눼에~눼에~."

(뚝.)

"이상하게 남자들은 내 나이를 물어보고, 욕은 여자들이 더 많이 해."

박래군(54) 인권중심 사람 소장이 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인권중심 사람' 건물 2층에 있는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 유난히 막말 전화가 많이 오는 날이 있다. 박 소장이 뉴스에 등장한 날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재단을 찾은 23일은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인 박 소장이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서 말했다는 보톡스·마약 발언이 앞뒤 맥락 없이 언론에 쏟아져 나온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고장 난 레코드판을 틀어 놓은 듯 '빨갱이 타령'이 연신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성소수자·이주노동자·병역거부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들에게 인권재단 사람, 특히 재단의 간판 격인 박 소장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항의전화 전담반(?)인 난새씨는 "별로 신경은 안 쓴다"고 말했다.

"개와 고양이 언어라고 보면 돼요. 저쪽에서 왈왈하면 이쪽에서 야옹거리는데 당최 뭔 말을 하는지 서로 이해를 못해. 하하."

박 소장을 제외한 5명의 상근활동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안해 보였지만 나흘 전 당한 압수수색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정부가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단체로 구성된 4·16연대 출범을 앞두고 공안몰이를 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박 소장은 "구속시키겠다고 덤벼드는데 어쩌겠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최현모(48) 사무처장이 그런 박 소장을 향해 슬쩍 눈을 흘겼다. "그러게 그런 얘긴 왜 해. 잡혀가려고. 이 양반이 밖에서 무슨 얘기하고 다니나 맨날 조마조마해."

그러자 박 소장은 "나 잡혀 들어가면 옥중서신 프로젝트를 가동하면 된다"고 말했다.

"선생님, 저 래군인데요. 서울구치소 몇 사동 1.01평 독방, 찜통더위 속에서 부탁이 하나 있어 편지를 드립니다. 재단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눈물의 옥중편지를 쓰는 거지. 으하하."

박 소장은 "기금 모금을 위한 새로운 마케팅 기법"이라며 너스레를 떨다가도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답답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구속 여부가 이제 막 첫발을 뗀 재단 '365기금' 모금사업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급하다"고, "함께 일하는 활동가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정택용 사진가

인권재단 사람의 두 번째 무한도전

365기금 모금운동은 인권재단 사람이 '인권중심 사람' 건립에 이어 두 번째 도전하는 사회적 기금 만들기 프로젝트다. 기금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활동비로 근근이 살아가는 인권활동가들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체온 36.5℃인 사람을 생각하고, 365일 인권을 위해 뛰는 인권활동가들을 든든하게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365기금'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365기금은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 재단은 올해 1월부터 석 달간 전국 41개 인권단체 활동가 76명을 대상으로 생활실태 설문조사를 했다. 이 중 10명을 심층면접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암울한 결과가 나왔다.

'인권활동가 활동비 처우 및 생활실태 연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평균 활동기간 8년3개월, 평균 나이 34.8살인 인권활동가들이 받는 월평균 기본급은 99만원에 불과했다. 올해 법정 최저임금인 월 117만원을 한참 밑돈다. 1주일에 2~3일 정도만 근무하는 반상임활동가들의 평균 기본급은 54만원으로 투잡·스리잡을 뛰지 않고서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 이들의 월평균 생활비는 111만원. 월세를 내거나 병원비나 식비 같은 기본적인 생활비 지출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영화를 한 편 보는 것도, 옷 한 벌·책 한 권 구입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로 치부된다. 이들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활동비는 월평균 166만원이었다.

박 소장은 "조사 결과를 쓱 훑어봐도 인권활동가들이 우리 사회의 극빈층이자 삼포세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열악한 생활 속에서도 인권활동가들의 사명감은 높았다. "10년 뒤에도 인권활동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절반이 넘는 44명(57.9%)이 "할 수 있는 한 지속하고 싶다"고 답했다. "반드시 지속하겠다"는 응답자도 7명(9.2%)이나 됐다.

하지만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박봉과 장시간 노동으로 앞을 내다볼 여유가 없는 활동가들도 여럿 있었다. "(인권활동을) 지속하고 싶지만 (앞으로) 어떨지 모르겠다"(21명·27.6%)고 답한 활동가들의 절반 이상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정도의 수입(12명·54.5%)으로 힘들어했다.

"활동가들이 인권적 가치실현에 대한 자기의지가 있기 때문에 열악한 상황에서도 현장을 지키고 있지만, 의지만 갖고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물질적 기반 없이 냅다 뛰라고만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최현모 사무처장의 말이다.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평생 모르고 지나칠 인권활동가들의 궁박한 삶을 이제는 사회가 함께 돌아보고 살펴봐야 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365기금 후원, 인권 가치에 투자하는 행위"

모금기획팀장인 정민석(37)씨는 "기금을 모아 인권활동가들의 급여를 지원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돈으로 지원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인권활동가들의 공통된 욕구인 휴식과 건강, 교육에 금전적·비금전적인 지원을 할 계획이다.

쉬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쉬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휴가비를 지원하거나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는 식이다. 건강을 챙기지 못하는 활동가들에게는 의료단체들과 연계해 건강검진 이상의 것들을 제공할 생각이다. 교육도 한다. 박 소장은 "나흘 일하면 하루는 공부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활동가들의 삶이 안정되고 자기 전망을 세울 여력이 생길 때, 지속적인 인권운동이 가능하다. 결국 사람에 투자하는 수밖에 없다. 재단의 올해 모금 목표는 3천650만원이다. 여름휴가 기간인 8~9월에 맞춰 활동가들에게 휴가비를 지원하는 게 1차 목표다. 모금 시작 한 달 만에 500여명이 365기금에 일시기부를 했고, 60여명이 1만원 이상 정기기부자가 됐다.

정민석씨는 "인권센터 건립 때보다 기금 모금이 훨씬 어렵긴 하다"고 털어놓았다.

"난치병 환자들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에 대한 기부문화는 많이 확산돼 있어요. 뿌듯한 뭔가가 있으니까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인권활동가를 위해 주머니를 여는 게 쉽진 않겠죠."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밀양송전탑 반대 할머니들 옆에서,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주민들의 곁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곁에서 울고 웃으며 함께 싸우는 이들이 인권활동가들이다.

박 소장은 "인권활동가들이 지키고자 하는 인권의 가치에 투자했으면 좋겠다"며 "한 달에 1만원이면 인권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365기금 후원하기 : 100-029-833027(신한은행) 재단법인 인권재단 사람

 '인권중심 사람' 두 돌 맞아

"내년 2월이 계약만료인데요. 어휴, 나가고 싶지 않아요. 여기 너무 좋아요."

'인권중심 사람' 2층 사무실에서 만난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상임연구원인 정현희(32)씨는 1년도 채 남지 않은 사무실 계약기간만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사무실이라고 해 봤자 책상·의자 하나에 컴퓨터, 전화기 한 대가 끝이다.

하지만 회의실 하나 없어 쩔쩔매던 과거를 생각하면, 한 달 5만원만 내면 눈치보지 않고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인권중심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내년 2월이면 사무실을 떠나야 한다. 계약내용이 그렇다. 계약의 갑은 '인권재단 사람'이고, 연구회는 을, 세입자다. 연구회는 인권재단 사람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인권단체 인큐베이팅' 사업에 공모해 선정됐다. 인큐베이팅은 사무실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인권단체들에게 2년 동안 관리비 정도(월 5만원)만 받고 사무공간과 집기를 제공하며 자립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연구회 바로 앞 책상을 사용하는 주거인권단체인 전국세입자협회도 그렇게 육성되는 단체 중 하나다. 정씨는 "성소수자들에게 인권재단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이라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1주일에 한두 번은 이곳에 들른다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 나영(38)씨에게 인권중심 사람은 놀이터와도 같다. 3층에 입주한 섬돌향린교회에 다니는 데다 집도 가깝고, 무엇보다 다양한 크기의 회의실을 저렴한 가격에 빌릴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했다.

나영씨는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는 회의를 한 번 할 때마다 장소 때문에 고민스러웠는데, 요즘은 대관료 걱정없이 이곳에 오면 되니까 좋다"고 했다. 작은 회의실은 시간당 1만원, 80명 규모의 다목적홀은 시간당 3만원이다. 인권단체들은 30% 에누리도 해 준다.

국내 최초 민간인권센터이자 인권활동가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인 인권중심 사람이 성미산 부근에 개관한 지도 2년이 지났다. 지난해 한 해에만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권중심 사람을 찾아 회의부터 콘서트까지 자유로운 인권활동을 펼쳤다. 공공기관 건물 대관에 어려움을 겪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용률이 높았고, 지역주민들도 자주 이용한다.

인권중심 사람의 밑그림이 그려진 건 2009년 겨울이었다. 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 활동을 하다 수배중이던 박래군 소장을 재단 활동가들이 찾아와 인권단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사무실 하나 없어 회의 한 번 할 때마다 이 단체 저 단체의 빈방을 기웃거려야 하는 인권단체들의 '메뚜기 신세'를 해결하자는 얘기였다. 이듬해 수배생활을 끝내고 구속됐던 박 소장이 출소 후 영치금 100만원을 내놨다. 재단 이사들이 십시일반해 종잣돈 2천만원을 마련했다. 이때가 2010년 9월이었다. 그해 11월 문정현 신부 헌정콘서트를 계기로 인권센터 건립운동을 본격화했다. 기금 마련을 위해 전시회를 열고 전국투어를 했다. 기적의 돼지저금통도 뿌렸다. 인권센터 건립 취지에 공감한 시민 2천914명이 소중한 주춧돌을 놓았다. 강연료를 기부한 교사, 결혼 축의금을 낸 신혼부부, 밥값을 모아 보내 준 직장인, 1억원을 보낸 익명의 통 큰 기부자까지 자발적 정성이 모였다. 그렇게 모금 시작 30개월 만인 2013년 4월29일 성산동에 4층짜리 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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