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한 흑사병(페스트)과 스페인독감이 바로 그 예다.

흑사병은 유럽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원인이었다. 14세기 유럽 인구는 7천500만명이었는데 흑사병이 확산되자 3분의 1로 줄어 버렸다. 인구가 줄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중세 유럽의 근간을 이루는 장원제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장원을 경영했던 영주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농노의 지위를 향상시켜주거나, 봉건적 속박에서 풀어줬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제도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1차 세계대전과 한창이던 20세기 초에 유행병처럼 확산된 스페인독감은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대규모 살육전이라고 평가된 1차 세계대전 사망자만 1천500만명이었다. 반면 스페인독감에 걸려 죽은 이들은 5천만명에 달했다. 결국 1차 세계대전 참전국들은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염병’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의 종류는 다양해 졌고, 확산 주기도 빨라졌다. 21세기는 신종바이러스의 시대다. 조류독감(사스)·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에볼라바이러스·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은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번지고 있는 전염병들이다. 사스·신종플루에 이어 메르스가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보건당국은 지난 4일 현재 메르스 관련 격리자만 1천667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메르스 감염 확진자는 35명, 감염의심자는 601명이다. 메르스 확산 속도는 일반인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장·회사·학교·병원·공연장 등은 각별한 방역대책이 요구된다.

그런데 쉼 없이 기계를 돌리거나 서비스를 중단할 수 없는 공장과 사업장은 그야말로 전염병의 취약지대다. 산업현장은 전염병 확산에 속수무책이라는 얘기다. 평택의 버스회사는 한 임원이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음에도 평소처럼 버스운행을 했다. 평택보건소는 버스회사 노동자 240명을 대상으로 검진을 실시하기로 했는데 방역대책은 여기까지다. 운전기사들에겐 손세정제와 마스크를 나눠줬을 뿐이다. 확진 환자가 발생했는데도 소극적 방역대책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산업안전보건법 45조에 따르면 사업주는 감염병, 정신병 또는 근로로 인해 병세가 크게 악화될 우려가 있는 질병에 걸린 자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근로를 금지하거나 제한한다. 하지만 전염병에 걸린 직원에 대한 유급휴가 여부도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는데다 다른 직원에 대한 예방조치는 규정돼 있지 않다. 이러다 보니 사업주나 노동자 모두 전염병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감염을 의심하더라도 은폐하기 일쑤다. 공장을 돌리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우선이지 노동자의 건강은 뒷전인 셈이다. 물론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선 노사가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열어 전염병에 걸린 직원에게 유급휴가를 부여한다. 반면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선 전염병 치료 직원에 대해선 무급휴가로 처리한다.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은 전염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 공항과 병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은 전염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그런데 비정규직에겐 전염병의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거나, 예방교육도 하지 않는 실정이다. 정규직에겐 전염병 보호장구를 제대로 지급하는 반면 비정규직은 알아서 마련하라는 분위기다. 메르스 확산 진앙지인 병원의 경우 비정규직에겐 마스크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국립대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는 유행병이 돌아도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병동을 청소한다고 한다. 병원 내에 방역 관리체계에서도 하청 비정규 노동자는 제외돼 있는 셈이다.

이처럼 산업현장은 전염병에 대한 대책도 없이 그저 ‘공장만 돌리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또 신종 전염병의 등장과 확산이 대세가 됐음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은 그저 감염자에 대한 격리만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신종 전염병 확산에 대한 소극적 대처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정부는 신종 전염병 시대에 맞춰 산업안전보건법을 능동적으로 재규정해야 한다. 전염병 감염자 격리뿐만 아니라 유급휴가 조치, 그리고 비감염 직원에 대한 예방대책도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감염자가 확산될 경우 공장 가동이나 서비스를 중단하는 방안과 절차도 고려해 봐야 한다.

전염병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 먹고, 잘 쉬는 것이다. 하루 8시간 일하고 충분히 쉬는 것이 전염병을 이기는 길이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노동자가 건강해야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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