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지주는 노예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순간, 노예는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무무>를 통해 노예가 당당한 주체로 서게 되는 과정을 소개한다. 감정의 주인이 되는 것 자체를 막으려는 여지주와 순진한 농노 게라심. 늘 체념하고 굴복하던 게라심은 우연히 ‘무무’라는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 하지만 이를 경계한 여지주가 강아지를 죽이려 하자, 게라심은 깨닫게 된다.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도 지킬 수 없다는 진실을. 결국 게라심은 차라리 자기 손으로 무무를 죽이고 만다. 표면적으로 게라심은 여지주의 압력에 굴복한 듯 보이지만, 여지주는 무무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소극적이나마 게라심은 주체적인 결단을 내린 행동을 한 것이다.

사람은 수많은 감정들로 싸여 있는 무궁무진한 존재다. 간단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뿐더러 설명한다 해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감정이 벗겨질 때마다 전혀 새로운 힘이 나오는 것이 사람이니까. 상사 앞에서 감정 따위 구겨 버리는 순한 게라심과 같은 당신이라면 너무도 연약한 일개 사원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지켜 주고 싶은 존재 앞에서 섰을 때 우리는 기어코 ‘슈퍼파워 힘맨’이 되고 만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지켜 줘야 할 자식 앞에 강인한 존재가 되는 힘, 비단 여자와 어머니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출근기록부로 통보한 해고, 소녀 일어서다

여기 어머니만큼 강인한 소녀들이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한 건 올해 2월이었다. 무심히 인터넷 창 스크롤을 내리던 중 낯선 사진을 한 장 발견한 것이다. 내 또래의 평범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모베이스는 파견노동자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고 쓰여 있는 플래카드 뒤에서 발언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단숨에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한겨울 길거리에서 추위와 배신감, 그리고 억울함에 덜덜 떨며 서 있는 그 소녀가 꼭 내 모습 같았다.

삼성전자 1차 협력업체인 모베이스 공장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아침 출근 후 출근기록부를 펼쳤는데, 이름 옆에 쓰인 문구는 난데없이 '파견 종료'였다고 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잘린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출근했다는 그날, 1년 넘게 같이 일하며 친해진 언니들과 함께 총 세 명이 계약종료됐다고 한다. 회사는 물량이 감소해 인원을 감축한다고 했지만 세 명 외에는 잘린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10명 정도 인원이 추가됐다.

세 명에게는 공통된 부분이 있었으니, 최근 주휴수당을 달라고 항의해 한 달여 만에 받아 낸 멤버라는 점이다. 해고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펑펑 울었다는 그녀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쓰러져 울고만 있지 않았다. 사실상 해고된 세 사람은 지난해 11월 모베이스를 고용노동지청에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자 모베이스는 이들이 일하던 조립부 업무를 외주화시켜 버렸다. 외주화로 사용업체가 바뀌면서 모베이스는 불법파견 직접고용 의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용업체가 모베이스에서 외주업체로 바뀌는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거부한 파견노동자 12명은 지난해 12월 추가로 회사를 고소했다.

“내 권리를 주장했을 뿐인데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너무 쉽게 잘려 억울했다”며 “우리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 안 될 것 같아 고소를 결심했다”는 그녀들. 그 고마운 마음, 다른 사람은 우리처럼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이들을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고용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임을 인정받고, 모베이스는 직접고용 의무를 실행하도록 시정지시를 받았다.

파견탈출 프로젝트 시작되다

안산에서도 불법파견을 근절시키기 위한 활동이 한창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판이 조금 크다. 하나의 회사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지역 전체를 흔들어 볼 계획이란다. 민주노총 안산지부에서 반월·시화공단의 제조업 불법파견 노동을 뿌리뽑기 위해 ‘파견탈출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현재로선 불법파견 문제가 반월·시화공단의 특수한 문제로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정부와 재계가 제조업 파견을 허용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만큼 전국적이고, 노동자 전체의 문제다. 안산지부가 반월·시화공단의 사례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도, 제조업 파견노동이 허용되면 노동시장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다.

안산지부는 온·오프라인 활동을 병행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 5월7일,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파견사용업체 27곳에 대한 진정서 제출과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안산지청장 면담으로 프로젝트 포문을 열었다. 수년간 제보와 상담 자료를 축적한 만큼 다양한 사례가 준비돼 있다.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인 요구로 구체적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만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산지부에서 제시한 요구사항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법·제도 개선이다. 일시적·간헐적 사유로 파견을 쓸 경우에는 노동부에 직접 그 증명서류를 첨부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불법파견이 확인되면 기간제로 계약 후 해고하는 사례가 빈번한 만큼 정규직으로 고용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두 번째는 안산시흥지역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이다. 안산시흥지역에서 이뤄지는 제조업 파견노동의 90% 이상은 불법파견이다. 노동환경도 열악하기 짝이 없다. 안산시흥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제조업 불법파견이 자행되는 곳이다.

세 번째는 상설 민관감시기구 설치다. 만연해 있는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노동부와 지역의 노동·사회단체가 함께하는 (가칭)불법파견 신고상담센터 같은 기구를 만들어 불법파견을 근절하자는 것이다.

노동자가 움직인다, 세상이 움직인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개처럼 일한다"고 해서 탄생한 ‘파견이’ 캐릭터도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5월1일 노동절에 파견이는 5월7일 계획된 일정을 경고장 형식으로 뿌리며 자신의 존재와 그 활동 내용을 알렸다. 앞으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앙큼한 방식으로 활동할 것이라는 파견이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더욱 가깝게 만나 볼 수 있다. 조만간 실천 캠페인을 제안할 것이라니 기대해 볼 만하겠다.

기업은 끊임없이 진화해 간다. 흡사 아메바와 같다. 흐물거리며 필요한 모양대로 자신을 변형시키고, 오로지 돈만을 생각하는 단순한 생물체 말이다. 반면 우리는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는 주입식 교육 아래 말 잘 듣는 법을 익혀 왔고, 군대에서는 각 잡는 법을, 사회에 나와서는 권력 앞에 무릎 꿇는 법을 배워 왔다. 하지만 이렇게 얼음처럼 딱딱하게 얼어 있어서야,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이 움직인다. 체념과 굴복의 껍질을 기어이 벗겨 내고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 돼 세상을 움직인다. 이른 새벽, 돌도 안 된 딸을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눈물 가득 출근하던 어머니가 그 딸을 지켜 주기 위해 움직인다. 장가 못 간 아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고생만 하다 쭈그러진 어머니를 위해, 이제는 늙어 버린 아들이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움직인다. 부푼 꿈 안고 올라온 시골 청년, 높은 세상의 벽에 늘 좌절했지만 끝까지 그 꿈을 지켜 내기 위해 움직인다.

노동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온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작은 균열이 크고 견고한 벽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그리하여 함께인 우리는 또 얼마나 강해지는지 같이 확인할 수 있길 바란다. 5월의 하늘이 맑고 푸르다. 꼭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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