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민주노동당이 잘나가던 시절인 2002년 9월 민주노동당-민주노총 연수단에 속해 노동자 출신 룰라와 그가 속한 노동자당(PT)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배우러 브라질에 갔다. 연수단은 민주노동당 10명과 민주노총 5명 등 15명으로 이뤄졌다. 당 국제 담당을 비상근으로 맡고 있던 터라 브라질 연수계획과 집행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는 민주노동당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영길 당 대표를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활발한 사업을 벌이던 때였다.

브라질의 ‘민주노총’인 CUT와 노동자당을 방문했고, 룰라를 지지한 브라질공산당과 중소기업사용자협회 등 여러 곳을 둘러봤다. 상파울루 중심지에서 노동자당 후보를 위한 행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귀국일을 이틀 남기고 유세장에서 어렵사리 룰라를 만나 악수를 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다. 연수단을 대표해 노회찬 사무총장이 ‘힘’을 상징하는 인삼차를 선물한 게 기억에 남는다.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많은 게 가물가물하지만 인삼차 선물과 함께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Decente Brasil'. 노동자당과 룰라의 선거 구호다. 영어론 ‘Decent Brazil’, 우리말로는 ‘괜찮은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는 자신들이 집권하면 브라질을 괜찮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룰라 집권 8년 동안 브라질은 이전과 비교해 꽤 괜찮은 나라가 됐다.

Decent Brazil은 국제노동기구(ILO)가 내세운 'Decent Work'에서 따온 게 분명했다. 우리말로 좋은 일자리인 Decent Work는 “일자리의 양과 일자리의 질은 분리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고용·노동권·사회적 보호(사회보장)·사회적 대화를 네 가지 기둥으로 내세운다. 기둥 네 개 가운데 하나만 없어져도 좋은 일자리는 제대로 설 수 없다는 게 ILO의 입장이다. ILO가 말하는 좋은 일자리는 “고용률 70%” 주문만 반복하면서 나쁜 일자리나 좋은 일자리나 ‘도긴개긴’이라는 대한민국 고용노동부의 약장수 논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좋은 일자리는 중국에서 ‘체면공작’이라고 한다. 남 보기에 체면이 서는 떳떳한, 쉽게 말해 ‘쪽팔리지 않는’ 일자리란 뜻이다. 대한민국 고용노동부는 Decent Work를 ‘양질의 일자리’로 번역해 왔는데, 이는 과도한 해석이다. 해석이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하니, 좋은 일자리와 관련한 노동부의 정책과 사업이 말 따로 몸 따로 끝나는 게 수두룩하다. 사실 노동부 안에 ILO의 목표인 좋은 일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노동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정책 비전으로 ‘노동존중특별시, 서울’을 제시하면서 노동시간단축과 고용노동국 설치 등을 약속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노동행정 계획을 수립한 곳은 서울시뿐이라 한다.

서울시의 노동정책 기본계획은 노동교육과 노동권 침해 사례 정리, 취약 노동자 사각지대 해소, 여성노동자 쉼터 확충, 감정노동자 가이드라인 마련, 특수고용직 사회보험 적용 방안, 생활임금제 확대, 노동시간단축을 위한 시간관리 센터 설치, 안전사고 예방, 청소노동자 환경 개선 등 노동자들의 일과 삶에 밀접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좋은 일자리, 즉 Decent Work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서울시민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창피해 하지 않는, 괜찮게 먹고살 수 있는, 그래서 괜찮은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일자리는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 의지를 갖고 목표를 세우고 정책을 바꾸고 제도를 개선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지역에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려는 노력은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지역조직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은 공중분해돼 역사 박물관으로 사라진 민주노동당을 생각해 본다. 실패한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중앙을 탐하는 이들만 승승장구했지 지역에서 (혹은 지역으로) 헌신한 사람들은 찬밥 신세였다는 점도 한몫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지역조직들이 좋은 일자리를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활발히 실천하고 있다면, 노동조합운동과 진보운동 발전에 이보다 더 좋은 거름은 없을 것이다.

박원순 시장이 이끄는 서울시가 추진하려는 노동정책 기본계획이 1천만 서울시민 모두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서울시민이 누릴 Decent Work가 서울을 ‘Decent Seoul’로 탈바꿈시키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 좋은 일자리와 좋은 삶, 괜찮은 일자리와 괜찮은 삶, 멋진 일자리와 멋진 삶은 함께 가는 것이다. 도시와 나라도 마찬가지다. Decent Work가 이뤄질 때 Decent Seoul, 나아가 Decent Korea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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