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사 석탑,합판에유채,1938년무렵,개인소장
▲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어쩐지 풍경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그림이다. 짙은 녹음을 뒤로한 채 경상남도 합천의 유서 깊은 사찰 해인사의 삼층석탑이 단정하게 서 있다. 오른쪽에는 해인사 석등이 곁을 지키고 있고, 그 뒤에는 해인사 본당인 대적광전이 부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삼층석탑은 작품 제목에도 쓰였다시피 이 그림의 주인공이지만, 구도상 중앙에 놓여 있는 것만 빼고는 그다지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한 모습이다. 오히려 배경과 혼연일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튀는’ 것을 애써 자제한 듯 그려졌다. 게다가 해인사 대적광전은 화려한 단청을 자랑하는 건물이건만, 그림에서는 청회색 계열의 색깔로 수수하게 본 모습을 감췄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로 기록돼 있는 나혜석(1896~1948년)이다. 이 그림은 현재 남아 있는 그녀의 그림 중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돼 있다. 당연하겠지만 그림을 그릴 당시인 1938년 4월15일부터 7월15일까지 나혜석은 하안거(夏安居, 불교에서 승려들이 여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일) 참선에 참여하기 위해 해인사에 있었다. 의아한 일이다. 나혜석은 사실 ‘참선’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신여성이었다. 국내 최초의 미술전공 여성유학생, 최초의 여성 소설가, 서울에서 최초로 서양화 전시회를 개최한 작가, 국내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여성 등. 나혜석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니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해인사에서 스님처럼 참선을 하며 ‘얌전하고 소박한’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죽음은 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10년 후인 1948년 12월10일 나혜석은 길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아무런 소지품도 없이 불과 5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울 시립병원인 자제원의 무연고자 병동으로 옮겨졌다. ‘행려병자’로 사망했다며 1949년 <관보>에 공고되기도 했다. 나혜석에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혜석은 1896년 4월28일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은 한일합방 전 사법관을 지내다가 시흥과 용인군수를 역임해 나혜석은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는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혜석은 그 덕분에 시대적 한계를 딛고 남자 못지않은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고, 또 두각을 나타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1913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서양화 전공은 한국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고, 남녀 통틀어서도 네 번째였다. 선구자 나혜석은 경력 또한 차곡차곡 화려하게 채워 나갔다. 1921년 3월에는 급기야 서울에서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에서는 1916년 평양에서 개최된 김관호 개인전에 이은 두 번째였고, 여자로서는 최초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틀간 5천여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몰렸고 전시된 70여점의 작품 중 20여점은 고가에 팔렸다. 그녀는 잘나가는 화가였다.

그렇게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로 승승장구했던 나혜석의 인생에서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때는 1927년, 그녀 나이 32세 때였다. 외교관으로 재직한 남편 김우영에 대한 포상이었던 세계 일주 여행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도 쉽지 않은 세계 일주를 일제강점기에 부부동반으로 했다니, 이것은 분명 누가 보기에도 행운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여행은 이후 나혜석의 삶을 파멸로 이끈 계기가 되고 말았다. 최린(1878~?)을 파리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최린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변절해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가 되는 등 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에 나선 인물이다. 그 역시 1927년 구미 30여개 나라를 유람 중이었다. 최린과 나혜석은 금세 친해졌고 연인으로까지 발전돼 결국 ‘부적절한 관계’까지 가지게 된다. 이내 파리 유학생 사회에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남편 김우영의 귀에 이 소문이 안 들어갈 리 없었다.

마침내 1930년 11월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애원하는 나혜석의 간청도 소용 없이, 간통죄로 고발하겠다는 위협에 그녀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이후 나혜석은 ‘여성이 얼마나 사회에서 약자인가’를 스스로의 삶으로서 증명하게 됐다. 이혼 즉시 그녀는 아무것도 없이 몸만 달랑 집에서 쫓겨났다. 결혼 후 모은 재산에 대해서도 아무런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다. 3남1녀의 어머니였건만 아이들조차 만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림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동아줄을 잡기 위해 나혜석은 금강산 해금강까지 가서 30~40점의 그림을 ‘전투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운마저 나혜석을 떠나간 걸까. 집에 불이 나 10여점밖에 건지지 못하는 불행이 닥쳤고 이때의 충격으로 병이 나 왼팔에 수전증이 생겼다. 화가에게 수전증은 치명적이다. 병 때문인지 ‘스캔들과 그로 인한 이혼’이라는 사회적 질시 때문이었는지 나혜석은 1933년에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으로 낙선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공격이 점점 더 심해졌던 이때에도 나혜석은 여전히 씩씩했다. 1934년 <삼천리> 8월호와 9월호에 이혼한 김우영 앞으로 띄운 ‘이혼 고백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혼 고백서를 통해 나혜석은 자신의 반생과 특히 연애·결혼·이혼 과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예상했던 대로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남녀문제를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밝힌 나혜석의 행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파리 시절 같이 연애를 했건만 조선에 돌아와서는 나혜석이 겪는 곤경을 수수방관하는 최린에게 공개적으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나혜석의 이 같은 행동은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거센 사회의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점차 사회로부터 소외당했다. 화가로서의 재기를 꿈꾸며 어렵게 열었던 1935년 10월의 개인 전람회가 별 반향을 얻지 못한 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나혜석의 삶은 극도의 신경쇠약과 외로움, 그로 인한 건강악화로 점철됐다. 집안 망신이라며 친정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사회에서도 강제로 밀려난 나혜석이 의탁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때 나혜석은 앞서 봤던 <해인사 석탑>을 그린다. 이미 건강이 나빠진 상태였지만, 붓을 놓지는 않았다. 불교에 귀의해 평안을 찾으면 예전처럼 활발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림 속의 석탑은, 폭풍 같았던 개인사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단정하면서도 안정적이다. 하지만 건강은 점차 악화돼 해인사에서의 마지막 그림과 글을 남긴 다음해에는 뇌졸중으로 반신불구가 돼 버렸다. 이 무렵부터의 행적은 분명치 않다. 아이들을 보러 집에 찾아가도 김우영이 여러 차례 경찰을 동원해 멀리 추방시켜 버렸다는 비참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결국 1948년 12월10일 추운 겨울날, 나혜석은 아무도 모르게 길 위에 쓰러졌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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