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청계피복노조는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통해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럼에도 당국은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노조는 보다 강력한 투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고 합법성을 쟁취하기로 했다.

그 방법으로 노학연대 투쟁을 통해 요구를 관철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강력한 투쟁의 무기는 파업으로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탄압받는 청계피복노조의 역량으로는 파업투쟁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자체 역량만으로는 시위나 농성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와 학생이 연대해서 싸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청계피복노조는 전통적으로 학생운동과 연대해서 투쟁해 왔다.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 이후 노조 결성도 학생들의 지원을 받았고, 84년 노조 복구도 야학연합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이번에도 대학생들과 연대해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노조 지도부는 형제교회 야학팀인 시정의 집 김환기·류도경·이영동 등을 통해 각 대학 학생회와 연결고리를 갖고 각 대학 총학생회 민중지원 책임자와 전술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도부는 노동조합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한 전략·전술을 수립했다. 우선 전두환 정권이 청계피복노조를 비롯해 민주노조를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파괴한 것은 부당한 조치임을 폭로하고 노조를 복구한 것은 정당하다는 점을 알렸다. 따라서 불법노조라는 명분으로 탄압하는 것을 중단하고 합법성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연행·구속도 각오한 투쟁 결의

노조는 일회성 투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합법성을 쟁취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투쟁 장소는 상징적으로 평화시장 구름다리 아래 전태일 분신자리에서 하되 봉쇄될 경우 그 자리를 향해 진격하기로 했다. 따라서 합법성 쟁취투쟁 방향은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공공연한 홍보를 통해 대중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으로 정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연행·구류·구속을 감내하기로 했다. 특히 대학생의 시위 참여숫자가 월등히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자칫 대학생 시위로 비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연행자를 일정하게 배치하기로 했다.

집행부 주요 간부들은 사무실에서 논의하는 것도 모자라 밤늦게 쌍문동 이소선 집에 모여 회의를 계속했다. 이럴 때마다 이소선은 이들이 먹고 자는 것을 신경 써야 했다. 70년대만 해도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이 집으로 몰려오면 이소선 자신이 직접 밥을 해서 먹이기도 했지만, 딸 순옥이가 도맡아서 했다. 그런데 이제 80년대가 돼서 그 일을 며느리 윤매실이 맡게 됐다. 이소선은 노조 지도부들의 열정적인 투쟁 논의에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투쟁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각 대학 투쟁 담당자들과 은밀하고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각 대학 학생회측 투쟁 지도부들이 이소선을 방문했을 때 이소선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우리 태일이가 대학생들을 부러워했어요. 어떻게 하면 학생들처럼 데모를 잘할 수 있는가, 우리 노동자도 그런 것을 배워서 학생들처럼 하면 근로기준법도 지키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권리도 지킬 것인데 하면서 말이에요. 태일이가 죽으면서 어머니는 노동자와 학생이 하나가 돼 함께 싸우라고 했어요.”

합법성 쟁취투쟁 준비를 마친 노조는 ‘제1차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를 알리는 격문을 청계천 전체 공장에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모이자! 9월19일 오후 1시 평화시장 앞길 전태일 동지의 외침이 살아 있는 구름다리 아래로, 모여서 싸워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을 쟁취하자!”

격문이 배포되자 경찰과 정보당국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소선은 가택연금되고, 위원장은 수배됐다. 지도부는 당국의 이런 조치에 대비해 미리 정보당국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84년 9월19일 오후 1시. 청계피복노조 ‘제1차 합법성 쟁취투쟁’을 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이 됐다.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청계천 5가에서 7가, 을지로 5가에서 신당동, 장충동에서 동대문 이대병원 앞까지 헬멧·방패·최루탄으로 무장한 경찰이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고 경비를 하고 있었다. 전투경찰은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만반의 태세를 갖춰 대비하고 있었다.

이렇듯 물샐틈없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노동자 학생들은 대열을 형성하고 진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동대오 형성이 중요했다. 초동대오가 형성되면 주변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가 그 대오를 중심으로 합세해 경찰과 대치해서 싸울 수 있는 전선이 형성된다.

피아간에 피를 말리는 긴장감 속에 드디어 오후 1시가 됐다. 그러자 청계천 6가 동대문상가 신발가게들(신평화시장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동자 학생들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튀어나오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청계피복노조 인정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예상 밖 시위에 오락가락한 경찰

순식간에 대오가 형성됐다. 130명의 대오는 스크럼을 짜고 청계천 고가차도로 올라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유인물을 뿌렸다.

130명은 구속도 불사한 이들이다. 서울대 40명·고려대 30명·연세대 30명·청계피복노조 조합원 30명으로 구성됐다.

1차 투쟁을 주동한 황만호 노조 부위원장은 건장한 학생들의 무등을 타고 고가차도에 올라갔다. 이들은 고가차도를 점거하고 동대문운동장 로터리 위쪽에 당도했다.

허를 찔린 경찰은 당황한 나머지 급히 방어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경찰로서는 고가차도를 점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 고가차도 아래에 흩어져 대기하고 있던 1천여명의 노동자와 학생이 로터리 사방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와 도로를 점거해 버렸다.

순식간에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지는 것에 당황한 경찰은 우왕좌왕했다. 경력이 급히 증강됐다. 최루탄·사과탄·지랄탄·페퍼포그에 시위대는 밀렸다가도 다시 대오를 정비해서 고가차도를 점거한 시위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를 거듭했다.

고가차도에서 하는 시위를 처음 당해 본 경찰은 고가차도가 어느 경찰서 관할이냐는 문제로 자기들끼리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서울시경 테러진압 전문 무술부대를 투입했다. 시경 무술경찰과 맞선 시위대는 양쪽에서 조여 오는 포위망을 피할 수 없었다. 경찰의 포위에 흥분해 자칫 고가차도 아래로 떨어지거나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이에 황만호 부위원장은 시위농성을 최대한 오래 버티면서도 시위대 안전에 최선을 다했다. 고가차도 시위대열은 40분 정도 고가차도에서 버티다 전원 연행됐다.

고가차도 아래 시위는 3시간가량 계속됐다. 경찰은 엄청난 최루가스를 퍼부으면서 시위대를 이화여대부속병원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시위대는 혜화동 로터리까지 퇴각하면서 이날 시위를 끝냈다. 122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은 17명이었다.

이소선은 시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이소선은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연행된 노동자와 학생들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연행된 노동자나 학생들은 최루가스로 범벅이 돼 눈물 콧물 흘리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씩씩하고 당당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소선은 안심이 됐다.

연행된 조합원과 학생들은 즉결심판으로 구류 29일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 다 정식재판을 청구해 연행 이틀 만에 석방됐다. 노조 조합원들은 1차 합법성 쟁취 투쟁 가두시위가 끝나자 곧바로 기독교회관 5층에 있는 사회선교협의회 사무실에서 “청계피복노조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은 1차 시위를 끝내고 조합원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투쟁을 정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시위는 광주 민중항쟁 이후 규모 있는 노학연대 가두시위였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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