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실 금융노조 은행연합회지부 위원장
하늘이 열린 백두산 천지의 별을 따서 내 마음에 담아 온 벅찬 감동에 가슴이 지금도 두근두근 뛴다. 아, 백두산 천지여!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 할아버지, 환웅이 내려온 곳. 그곳에 하늘이 열렸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처음엔 백두산에 가는 것을 망설였다. 내가 소속된 지부에 중요하고 급박한 현안이 산적해 있는 터였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 그 정기로 지친 심신을 정화하면 전보다 힘찬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을 굳혔다. 만주 벌판 말달리던 조상들의 피와 땀 그리고 영혼이 서린 백두산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2015년 3월27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29일 역사평화기행의 화룡점정이라 할 백두산 인근 마을 송강하(松江河)에 도착했다. 지도상으로는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505킬로미터 거리다. 제주도보다 기껏 50킬로미터 더 먼 셈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비행기와 버스를 갈아타며 무려 48시간 만에 백두산 앞에 섰다. 그것도 남의 땅을 돌아서 왔다. 분단된 조국의 아픔이다.

장거리 버스 여행으로 지친 우리 일행이 하룻밤을 보낸 송강하는 백두산에 오르는 전진기지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그칠 줄 모르는 봄비가 내렸다. 북녘 땅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과연 천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안겨 줬다.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1년 중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절실했다. 천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 후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현지인들은 백 번 올라도 두 번밖에 천지를 못 봐서 백두산이라며 농담을 한다고 한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나 보다. 밤새 내리던 봄비가 아침에 일어나니 멎어 있었다. 이틀 내내 시야를 방해하던 황사 구름도 아침 햇살에 녹아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행은 설레는 마음으로 백두산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내디뎠다. 예상 기온이 영하 40도라는 말에 방한복을 똘똘 동여매 입었지만 마음은 이미 천지에 가 있는 듯 가벼웠다.

백두산 정상에 가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숙소에서부터 버스 세 번을 갈아탄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박동소리를 행진곡 삼아 버스를 타는 동안 눈처럼 하얗게 펼쳐진 자작나무 숲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만주 벌판에서 말을 달리던 선열들의 넋을 순백의 소복으로 기리는 듯했다.

가슴이 시리다. 뿌옇던 하늘에 구름이 살짝 걷히면서 순백색의 백두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머리를 하고 있다고 백두산이라 했던가. 버스에서 내리니 이번엔 스노바이크를 갈아타고 올라야 한단다. 스노바이크에는 운전자를 포함해 3명이 올라탔다. 천지로 오르는 주차장에 당도하니 이제 마지막 1천442개의 계단이 보였다. 계단 입구에는 등상장백산일생평안(장백산 정상을 오르면 일생 동안 평안하다)이라고 쓰인 팻말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적막을 깨는 것은 거친 심장소리와 바람소리뿐이다. 절반쯤 올라 뒤를 돌아보니 구름이 발 아래로 피어오른다. 거친 숨을 쉬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눈은 천지의 장엄한 광경을 가득 담고 있었다. 심장은 터질 것만 같고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 모두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말없이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감정이 북받쳐 그 순간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엉엉 울고 싶었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백옥같이 얼어붙은 천지의 모습은 경건함 그 자체였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조상들의 패기가 솟아오름이 느껴졌다. 백두산을 넘어 만주와 중국을 무대로 기상을 떨치던 우리 한민족이 아니었던가.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천지에 예를 갖추고 싶었다. 일행은 준비해 간 소주로 잔을 올리고 모두 같이 큰절로 삼배를 했다. 평화와 자주·통일을 염원하면서. 그리고 서로의 건강과 행복도 기원하면서. 짧지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의 시간을 뒤로하고 석별의 징표로 아쉬운 발자국을 남긴 채 산을 내려왔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에서 보낸 짧은 시간 동안의 기억은 그 어떤 기록으로도 바뀌지 않고 내 가슴에 새겨져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내 가슴에 생애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을 갖게 해 준 매일노동뉴스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백두산에 오르기 전 나의 빈속과 허전한 마음을 달래 준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찐 달걀과 홍상철 전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 보좌관의 따뜻한 율무차 한 잔은 아직까지 너무나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 멀리서나마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행사가 꾸준히 이어져 내가 느꼈던 감동을 많은 이들이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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