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말이 없으면 생각도 없다. 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고 씀으로써 생각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말과 글이 잘돼 있을 때 생각도 잘되기 마련이다. 말과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말과 글이 알찰수록 생각이 넓고 깊어진다.

노동조합 교육을 하러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녀 보면 영어를 잘하는 나라일수록 노동운동 발전이 지체돼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인디아·홍콩이 대표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 나라는 영어를 잘한다기보다 영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인 나라다. 공용어가 있다는 말은 국민 대부분에게 엄마말(mother tongue)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공용어인 영어는 학교와 사회에서 애써 배워야 한다.

이들 나라에서 교육제도가 평등하다면 따로 배워야 하는 영어 실력도 국민 사이에 고를 것이다. 하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들은 불평등이 심하다. 교육은 더욱 그렇다 보니, 부자일수록 영어를 잘하고 빈자일수록 영어를 못한다. 자본가일수록 영어를 잘하고 노동자일수록 영어를 못한다. 노동조합운동 안에서도 지도자일수록 영어를 잘하고 조합원일수록 영어를 못한다.

말레이시아와 인도에서 교육을 하면 영어-현지어(인도는 힌디어,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어) 통역을 쓴다. 쉬운 영어로 해도 단위노조 대표자들인 참가자들이 애를 먹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산별노조 교육을 하는데, 전자 회사에서 일하는 한 참가자가 한참 늦게 왔다. 왜 늦었느냐 물으니 법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판결이 잘 나왔느냐 물으니 울상을 지었다. “진 것도 억울하지만 재판이 영어로 진행돼 제대로 알아먹을 수 없는 게 더 억울했다”고 했다. 한국으로 치면 해고노동자가 자기 사건으로 법원에 갔는데, 판사와 변호사가 자기들끼리 영어로 시부렁거린 셈이다.

산업별노조와 기업별노조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노동자와 종업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기업별노조는 특정 기업이나 사용자에 종속된 고용관계를 전제로 하는 종업원만이 가입할 수 있다. 산업별노조는 노동력을 팔아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영어로 노동자(worker)와 종업원(employee)의 차이를 물었는데,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래서 말레이말로 노동자가 뭐냐 물었다. 뻐끄르자(Pekerja)라는 답이 돌아왔다. 종업원은 뭐냐 물었다. 뻐끄르자라 했다. 이런 빌어먹을. worker와 employee의 차이가 뭐냐 물었는데, 뻐끄르자와 뻐끄르자의 차이가 뭐냐고 통역된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지배계급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영어로 막힘없이 의사소통이 되니 말레이어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세상은 변하는데 말과 글은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니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 나아질 리 없다.

인도에서 단체교섭 교육을 하며 질문을 던졌다.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이란 말은 collective와 bargaining의 조합인데,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두 단어 중 뭐가 더 중요할까. 단체(collective)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케이. 다음 질문은 단체교섭의 결과 노사가 체결하는 게 뭐냐다. 단체협약(collective agreement)이란 답을 기대하는데, memorandum of settlement라는 낯선 답이 돌아왔다. settlement는 해결됐다는 말이고 memorandum은 메모나 보고서를 뜻하니, 우리말로 합의각서다. 조합원들이 집단으로 교섭하고 합의 역시 집단으로 적용된다는 맥락에서 단체(collective)를 강조하려던 의도가 장애물을 만났다. 이걸 힌두어로 통역하는 인도 활동가는 죽는 표정을 지었다.

아시아 나라들과 비교하면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그 발전과 성취에서 ‘천국’이다. 노동운동가들과 노동자들의 희생과 고난이 밑거름이었다. 말과 글도 한몫했다. 노동조합 지도부와 조합원 모두 같은 말과 글을 쓴다. 노동자·자본가·정부관료 모두 영어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에 관련된 거의 모든 문제를 우리말과 글로 나타낼 수 있다. 한자(漢字)의 도움도 크다. 한국어가 잘돼 있으니 영어를 못해도 노동조합운동의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물론 배웠다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어설픈 한국어 ‘운동권 사투리’가 문제인 경우는 많다. 영어 못하는 나라에 사는 즐거움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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