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더 많이 불평등해졌다는 것은 굳이 어려운 경제학적 개념이나 복잡한 수치를 인용하지 않아도 모두가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는 바다. 현상 자체에는 이견이 없지만 원인과 처방에 대해서는 학자들과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여러 논쟁이 진행 중이다.

먼저 보수주의자들은 아예 소득불평등 자체가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세계 최고 부자가 됐다고 누가 손해를 봤냐는 질문이다. 오히려 빌 게이츠의 혁신 덕에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얻고 소득이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자 경제학자인 필 그램은 소득불평등에 관한 최근 이야기들은 ‘질투의 경제학’이라고 폄하한다. 국가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세금을 통한 재분배가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는 교육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세계적으로 소득불평등 논쟁에 불을 붙인 토마 피케티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세습적’ 부가 중요한 체계라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경제성장은 이런 세습성을 약화시키고 대중에게 부를 쌓을 기회를 주지만, 이런 정도의 성장은 300~400년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보면 20세기 30여년의 예외적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1% 내외의 지지부진한 성장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정상상태에 가깝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예외적 성장의 시기가 끝났고, 이제 자본주의의 정상상태, 즉 세습만이 부를 쌓는 시대가 다시 왔다. 그런데 이런 세습성은 평등과 인권을 기초로 삼는 민주주의까지 갉아먹는다.

그의 결론은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치유하려면 ‘성장’이 필요한데 이는 당장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강제로 조세를 통해 세습성을 약화시키는 재분배 정책을 강화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최근 중산층 경제란 이름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오바마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과 상위 1% 부자증세 정책을 추진하면서 논쟁이 학술적 부분만이 아니라 정부 실제 정책을 둘러싸고도 진행 중이다. 미국 개혁진영은 성장의 낙수효과가 사라져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늘어났고, 심지어 소비가 줄어들어 성장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의 대표적 연구기관 중 하나인 미국진보센터는 정책대안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주문하고 있다. 첫째는 노동자 소득 증대다. 공정한 최저임금, 가족 친화적인 노동표준, 이익공유제 등을 통해 노동자 소득을 높여 노동의욕을 고취하고 소비를 늘려야 한다. 둘째는 교육시스템 개혁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양질의 교육에 대해 접근할 수 있어야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고 생산성도 향상된다. 셋째는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기후변화 관련 투자 확대다. 경영자들의 단기적 이해 추구를 부추기는 고액연봉을 규제해야 경제 전체에 득이 되는 장기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투자가 기후변화 같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금과 관련한 국제적 공조다. 지금까지 각국은 조세를 내려 기업을 유치하는 바닥을 향한 경주를 해 왔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국제공조를 통해 탈세를 막고 공정한 조세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모순적 체계로 분석하는 마르크스주의는 현재의 소득불평등을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방식 중 하나로 파악한다. 세계경제는 70년대 이후 자본투자 증가에도 생산성이 예전만큼 향상되지 않는 한계에 봉착했다. 그 결과 투자자본 대비 이윤(이윤율)이 감소했다. 이렇다 보니 수익의 총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기업들은 자본을 더 많이 투자해야 하고, 노동자를 좀 더 쥐어짤 수 있어야 했다.

기업들은 더 많은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 금융 관련 규제를 없애고 신용을 극단적으로 증가시켰으며, 정부를 움직여 노조를 약화시키고 노동시장 규제를 줄였다. 90년대 이후 세계경제에서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이 유례없이 과열된 것은 단지 규제가 없어진 상황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경쟁의 덫에 빠져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 탓이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정부의 정치 성향보다는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산이 있는 사람이 금융시장에서 부를 쌓고, 일하는 노동자가 더 적은 소득을 가져가는 소득불평등은 자본주의 위기의 한 표현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따르면 해법은 부자증세나 최저임금 인상 같은 재분배 정책보다는 경제체계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앞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노조·협동조합·노동자정당 같은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이 정당한 임금과 소득재분배의 보편적 제도가 될 수 있어야 하며, 노동자들의 권력으로 대기업들을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나 몰락한 소련이 보여 준 현실 사회주의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당’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으로 사회제도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소득불평등에 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크게 보면 위에서 소개한 네 가지 조류다. 문제가 없으니 교육체계 정도를 바꿔 보자는 보수주의 대안, 성장이 불가하니 정부 주도로 강제적인 재분배를 시행해야 한다는 피케티적 대안,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중산층을 키우는 제도개혁을 해야 한다는 미국 민주당식 대안, 자본주의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적 해법. 한국의 노동운동이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대중적 토론이 필요한 듯하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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