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산별노조의 뼈대는 지역이 아니라 업종이어야 함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2015년 2월9일자 '산별노조운동 지역엔 답이 없다' 참조). 노동조합 활동의 핵심인 단체교섭에서 지역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전혀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는 크게 6개 업종으로 이뤄져 있다. 기계업종·자동차부품·완성차·조선·철강·전기전자가 그것이다. 그런데 업종별 동질성을 무시하고 지역별 동질성에 따라 교섭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금속’이라는 타이틀을 빼고는 산업 특징과 업무 성향이 전혀 다른 6개 업종이 한꺼번에 뒤섞여 교섭을 하게 된다. 교섭이라는 배는 제 항로를 이탈해 산으로 올라갈 게 뻔하다.

산별노조의 중요한 활동 영역 가운데 산업정책 개발과 참여가 있다. 산업정책은 조합원 일자리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와 자본은 자기 입맛대로 산업정책을 주무른다. 하지만 명색이 산별노조를 지향하는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개입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금융노조를 뺀다면 기업별노조 일색인 한국노총의 한계야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전체 조합원의 70% 이상이 산별노조에 속해 있다고 자랑하는 민주노총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산업정책 개입에서 어떤 차이를 보여 주나. 보건의료노조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산업정책을 마련하고 있는 민주노총 산하조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민간부문 단체교섭은 정부와 하는 게 아니라 자본, 즉 사용자와 하는 것이다. 기업별교섭의 경우 기업이나 공장 울타리 안에서 특정 사용자와 교섭을 한다. 우리가 기업과 공장의 울타리 안에 막혀 버린 틀을 깨고 초기업별 교섭을 추진할 때, 교섭 단위에서 몇 가지 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산업 단위 교섭(이른바 대산별교섭)이다. 금속노조는 금속산업을 대표하는 산업노조이므로 15만 조합원을 하나로 묶는 단일한 금속산업 교섭만 존재할 것이다. 둘째, 지역 단위 교섭이다. 업종별 특성이나 기업별 규모는 교섭 단위를 만들 때 고려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산업 안의 여러 업종별 특성을 인정한 교섭이다. 금속노조를 예로 들자면 6개 업종이 각기 하나의 교섭 단위를 갖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업종별 교섭을 지역 단위로 쪼개거나, 반대로 지역별 교섭을 업종 단위로 쪼개는 방법도 검토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어느 모델이 가장 현실적일까. 금속산업 전체를 묶는 단 하나의 단체교섭만 존재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이것은 기업별교섭이 판을 치는 오늘의 실정에선 실현 불가능하다. 독일과 스웨덴처럼 산별노조와 산별교섭이 우리보다 훨씬 발달한 나라에서도 1개 산별노조-1개 산별협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별 교섭 역시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금속산업을 보자. 기업별교섭이 횡행하는 울산이나 창원에서 완성차·자동차부품·기계·조선·철강·전기전자를 한데 묶어 단체교섭을 한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그 발상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언제부턴가 “산별노조는 지역 중심”이라는 국적불명의 주장이 정론처럼 떠돌더니 이제는 신주단지처럼 떠받들어진다. 교섭 단위도 지역 중심으로 짜야 한다는 잘못된 주장이 횡행해 왔다. 그 결과 산별노조 역사가 쌓여 갈수록 ‘무늬만 산별’인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교섭 단위가 조합원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다 보니, 초기업별 단체교섭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별 단체교섭을 뛰어넘어 산별교섭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업별로 쪼개진 교섭 단위를 (지역이 아닌) 업종으로 묶어야 한다. 전국 수준에서 업종별 교섭 틀을 만들기 어렵다면, 지역 수준에서 같은 업종에 속한 기업들을 동일한 교섭 단위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서울로의 중앙집중화가 철저하게 진행된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습을 미뤄 볼 때, 지역이 아닌 전국 단위 업종별교섭을 바로 추진하는 정책도 괜찮아 보인다.

조직 형식에서 사용자들은 준비가 돼 있다. 한국기계산업협회(기계업종)·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자동차부품)·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조선)·한국철강협회(철강)·한국자동차산업협회(완성차)는 오랜 역사를 갖고 정부 로비나 동향 파악 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업종별협회들이 사용자단체로서의 자세와 책임을 갖고 단체교섭 테이블에 나오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한국형 산별교섭의 전망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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