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마침내 거사 날인 1981년 1월30일이 다가왔다. 오후 2시30분께부터 을지로 6가에 있는 금용다방·은성다방·돌체다방 등에 동원된 조합원들이 은밀히 모였다. 한창 일해야 할 시간에, 그것도 비밀리에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조합원을 모으기는 어려웠다. 22명의 조합원이 참석했다.

세 군데 다방에 분산돼 있던 조합원들은 그룹별로 버스를 나눠 타고 오후 4시30분까지 강남구 서초동 63-23호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아프리·AAFLI)’가 입주해 있는 건물 앞에 집결했다. 건물 주위는 아무런 낌새도 없이 조용했고 인적조차 드물었다. 사실 이쪽 동네에 와 본 적이 별로 없어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모두 집결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이들은 일시에 3층에 있는 아프리 사무소에 몰려들었다.

조합원들, 서초동 아프리로

갑자기 노동자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아프리 사무소 직원들은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노동자들은 모리스 파라디노를 찾았다. 지부장과 모리스 파라디노 간 면담이 이뤄지고 있을 시간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외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 농성을 준비한 주모자들은 황당했다.

일행 중에 민종덕이 유일하게 한국인 직원 기획관 최광석을 알고 있었다. 민종덕은 최광석을 붙들고 자신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호소하러 왔다고 얘기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던 중 외출했던 한국 사무소장인 조지 커틴이 들어왔다. 조합원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합원들은 최광석의 통역 아래 커틴에게 파라디노를 면담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커틴은 파라디노의 일정이 분주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차후 면담일자를 정해 통고하겠다고 했다.

민종덕은 파라디노와 지부장이 없는 것은 미리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민종덕은 전날 신순애 부지부장한테 농성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그 시간에 오라고 했다. 신순애는 이 사실을 지부장한테 얘기했고, 임현재 지부장은 1월30일 오후 아프리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최광석 기획관에게 아이들이 몰려가니 피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파라디노와의 약속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그 시각 파라디노는 애초 아프리 사무소에 오기로 한 약속을 변경해 프라자호텔에 머물렀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파라디노를 면담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사무소장인 커틴이 자신들과 함께 있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커틴은 조합원들한테 귀가하라고 종용했다. 계속 함께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조합원들의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에 민종덕·신광용·김영대, 그리고 다수의 여성 조합원들이 커틴을 붙잡았다. 덩치가 큰 커틴은 뿌리치고 나가려고 했다.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는 커틴과 이를 막으려는 노동자들 간에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나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집단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몇 시간 동안 밀고 밀치는 실랑이 끝에 몸싸움에 지친 커틴을 소장실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신광용이 커틴을 붙잡고 있는 동안 본격적인 농성체제로 돌입했다. 아프리 사무소 여직원들을 내보내고,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읽어 주면서 최광석에게 내용을 통역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무실 출입문 두 군데에 책상·의자, 캐비닛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사무실에 걸려 있는 족자를 떼어 내고, 그 뒷면에 붉은 매직펜으로 "청계노조 원상복귀시켜라"는 글을 써서 창밖에 내걸었다. 이때가 밤 8시께였다.

조합원들은 창밖으로 성명서 등 유인물을 뿌리고 <노총가> <우리 승리하리라> <자!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새어 나간 계획, 그리고 강제해산

밤 9시께가 되자 경찰이 출동해 건물 주위를 새까맣게 포위했다. 경찰이 농성장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바리케이드로 입구가 막혀 있어 진입이 쉽지 않았다. 강남경찰서장은 노상에서 메가폰으로 계속해서 해산을 종용했다.

급기야 경찰은 건물 주위에 그물망을 치고 출입문을 뜯은 뒤 농성장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자 신광용이 난방용 석유통에서 석유를 사무실 주위에 뿌리고 만약 경찰이 들어오면 라이터로 불을 붙이겠다고 위협하면서 버텼다.

이런 상태로 밤 12시까지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데, 경찰이 12시를 신호로 일제히 창문을 깨고 출입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경찰과 노동자 간에 아수라장 같은 싸움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전태삼과 신광용이 3층에서 떨어졌다. 전태삼은 다행히 그물망으로 떨어져 부상을 입지 않았는데, 신광용은 맨땅으로 떨어져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머지 농성 조합원 전원은 경찰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며 끌려 나왔다. 곧바로 경찰차에 실려 강남경찰서로 연행됐다. 이로써 청계노조 강제해산에 항거하는 최후의 투쟁은 막을 내렸다.

민종덕은 애초에 아프리 사무소에서 농성을 하더라도 불과 몇 시간이면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할 것으로 예상했다. 밤샘농성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이곳에 온 지 서너 시간이 넘었는데도 예상 밖으로 경찰이 오지 않고 날도 어두워졌다. 그래서 밤샘농성에 대비해 외신기자를 부르고, 빵과 우유·양초 등을 사러 저녁 8시30분께 밖으로 나왔다. 물건을 사러 가게를 찾아 헤맨 끝에 빵·우유·양초를 사서 농성장에 당도했더니 이미 경찰들이 건물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민종덕은 농성장에 다시 들어가지 못한 채 그대로 수배를 당했다.

임현재 지부장은 최광석 기획관과의 통화에서 청계노조 조합원들이 농성을 한다는 사실을 듣고 밤 10시20분께 현장에 도착했다. 지부장은 농성 조합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3층으로 들어가겠다고 강남경찰서장에게 말했다. 경찰서장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고 대신 4층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그러다가 경찰서장의 지시에 따라 지부장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부장이 농성을 풀라고 설득했으나 조합원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농성 조합원 22명 전원이 강남경찰서로 연행됐다. 여기에 임현재 지부장과 이승철 지도위원도 연행됐다. 이소선은 조합원 농성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나중에 경찰은 병원에 입원한 이소선도 연행했다.

경찰은 연행자 중 전태삼·황만호·김영대·박계현·김성민·이덕곤·문숙주·임기만을 구속하고, 허리를 다친 신광용은 불구속 상태로 수사했다. 민종덕은 '엄탐(嚴探) 필포(必捕)'**** 하라며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아울러 이소선·임현재·이승철도 농성자들과 함께 구속시켰다.

이 밖에도 이날 농성에 참가했다 연행된 조합원은 함금순·박연준·이승춘·김재주·권태경·이정임·이남숙·이막순·김한영·차애숙·박경숙·정화숙 등이다.

연행된 조합원들은 경찰의 폭행과 심한 모욕을 당하면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서 조사하는 동안 커틴은 비교적 농성 조합원들한테 불리하지 않게 진술했다.

"농성 과정에서 석유를 뿌릴 때는 불을 지를 것으로 생각됐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위협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불을 지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음. 본인에게 폭행을 한 사람은 없고 욕설에 관해서는 한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알 수가 없고, 경찰이 진압하는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이 가위(사무실에 있는 것)를 본인의 머리에 들이댔는데, 그것도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경찰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으며 가위를 들이댄 사람은 기억할 수 없음. 제가 억류돼 있는 동안 조합원들은 노래를 부르고 슬로건을 외쳤습니다. 그들은 밖에 있는 경찰을 위협하려는 인상을 줬으나 저는 육체적으로 위협받지 않았습니다.(While I was held, the workers sang a song and chanted slogan. Although they made threats to impress the police outside I was not physically threatened)"*****

사실 초기에 커틴이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농성 조합원들은 상당한 정도의 육체적 위협을 가했다. 그럼에도 커틴은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다.

반면 상급조직인 연합노조 이운용 기획실장은 농성 조합원들한테 불리하게 진술했다.

"본건 농성이 있기 2일 전에 임현재를 만났더니 임현재가 하는 말이 그동안 몇 번 실력행사를 해서 노조를 복귀시키자는 기도가 있었으나 자신이 과격파인 전태삼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실력행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한 사실이 있었음. 몇 년 동안 본건 노조의 생태는 전태삼·신광용·민종덕·황만호 등이 과격파이고, 임현재·이승철·박재익·박원섭 등은 온건파인데 임현재가 지부장으로 당선이 된 것도 온건파가 일응 승리했다고 봐야 하는 것으로 임현재가 지부장이 되고 난 뒤에도 과격파의 반대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이소선은 지부장이 결정한 사항을 번복할 수 있을 정도의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 행적으로 보아 유인물 작성은 민종덕의 담당이었음."******

이운용 실장은 사건과 직접 관계없는 것까지도 진술함으로써 경찰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세워진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했다. 전태일 정신을 구현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과연 여기서 멈춘 것인가.

각주
1) 81년 1월31일 2·25 피의자 조서
2) 81년 1월31일 자술서
3) 81년 1월31일 자술서
4) 81년 2월5일 신병처리 지휘 품신 및 지휘 내용
5) 81년 2월26일 조지 커틴 진술조서
6) 81년 2월20일 진술조서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