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해마다 6월이면 국제노동기구(ILO) 총회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다. 노동계를 대변하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매년 대표자를 파견해 한국의 노동권 상황을 알리고 쟁점이 되는 노동 문제를 토론한다. 한국 노동계가 국제사회에 제기하는 이슈 중에는 일제강점기 위안부 문제도 포함된다.

ILO는 1930년 6월 열린 제14차 총회에서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을 제정했다. 해당 협약은 ILO가 만든 스물아홉 번째 협약으로 32년 5월부터 발효됐다. 협약에서 말하는 강제노동이란 노동자가 처벌 위협을 느끼며 자신의 자유의사에 반해 억지로 일하는 것을 말한다. 순수하게 군사적 특징을 갖는 병역의무는 강제노동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순전히 군사적 특징을 띠지 않는 병역의무는 강제노동으로 간주된다. 군대에 있어야 할 젊은이를 데려다 시위진압에 내모는 의무경찰제가 대표적이다. ILO 협약 제29호는 강제노동을 강요해서는 안 될 주체로 국가는 물론 기업과 단체와 개인까지 포괄한다.

일본은 32년 11월21일 ILO 협약 제29호를 비준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일본제국주의는 30년대와 40년대에 조선의 젊은이들을 중국과의 전쟁, 미국과의 전쟁에 내모는 징병·징용을 강행했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그 일부였다.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이 스스로 비준한 ILO 협약 제29호를 정면으로 위반했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양대 노총과 시민사회가 일본을 상대로 위안부 문제를 ILO 총회에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배경이다. 위안부 강제동원이 국제협약을 거스른 범죄 행위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국제기구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일본의 역사적 범죄를 겨냥한 손가락을 스스로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떳떳한가. 슬프고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역시 강제노동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의무경찰제가 수십 년 동안 버젓이 유지된 사실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정부는 91년 ILO에 가입한 이래 강제노동 금지를 규정한 협약 제29호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는 일본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ILO 협약 제29호 위반이라며 열심히 제소해 왔지만, 정작 한국 정부가 비준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강제노동 공화국’이 돼 버렸다.

대표적인 강제노동인 의무경찰이나 공익근무요원은 이미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공공부문 파업시 대체인력으로 투입돼 파업을 무력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강제노동은 사회적 약자에게 만연해 있다. 고용허가제로 국내에 들어와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보자. 이들은 고용주의 허가 없이 마음대로(voluntarily) 사업장을 옮길 수 없다. 임금이 적고 노동시간이 길고 노동조건이 열악하더라도 한 번 정해진 사업장에서 계속 일해야 한다.

특히 농사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의 고통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근로기준법 적용대상도 아니다. 대부분 4인 이하 일터에 채용될 뿐 아니라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더라도 노동시간 규제와 각종 수당 지급을 규정한 근기법 조항에서 배제돼 있다.

그래서 국제사면위원회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근기법과 관련 시행령을 시급히 개정해 노동시간·휴일·휴게시간·각종수당·숙식시설·근로감독의 영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라고 권고해 왔다. 국제사면위는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저임금에 기초한 장시간 노동체제도 강제노동이다. ‘귀족’이라 비난받는 현대자동차 정규직이 하루 8시간, 주 40시간 일해서 받는 임금은 그리 많지 않다. 특근과 잔업, 휴일근무 같은 사실상 강제노동을 통해 벌이를 보충해야 한다. 저임금 처벌 위협 속에 주야 맞교대를 밥 먹듯 하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부지기수다. 오죽했으면 연장근로를 따오는, 즉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는 노조간부가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세상이 됐겠는가. 위안부로 강제연행돼 타국에 끌려간 조선 소녀들의 사회적 지위는 ‘이주노동자’였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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