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사람이 살 수 없는 공중에 또다시 집 한 칸이 생겼다. 구미에서, 평택에서, 서울 도심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노동자들이 하늘로 올랐다. 일손을 멈추면 세상도 멈추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갈수록 기막히다. 자본 천국인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지옥처럼 차별과 굴종과 착취와 무시와 탄압에 고통받고 있다. 사용주에게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다. 이윤 극대화 도구일 뿐이다. 정부는 제 역할을 포기했다. 세월호 참사는 그 극단이었고, 일상에 잠복한 세월호 참사인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 앞에서 정부는 사라졌다.

노동자 과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 고용안정과 차별해소가 사회적 공감대를 얻게 된 지금도 비정규직 처지는 별반 나아진 게 없다. 아니 상대적으로 더 나빠졌다. 헌법에 정한 노동 3권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 최대 집단이면서도 사회적 발언권이 최소화된 비정규직은 어느새 천형처럼 벗어나기 힘든 나쁜 일자리의 대명사가 됐다. 대한민국은 약육강식 법칙이 관철되는 무자비한 생존의 정글로 화했다. 공동체는 무너졌다. 돈이, 집적된 화폐인 자본이 지상가치로 등극했다. 공권력도 자본의 위력 앞에서 고개 숙였다.

대다수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은 패배하거나 장기화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로 내쫓겼다. 노동자들은 압도적 다수이지만 한 줌도 안 되는 재벌 자본의 위세에 짓눌렸다. 단결된 하나로 자본에 맞서지 못한 채 우왕좌왕 분열돼 패퇴를 거듭했다. 자본의 진지가 철옹성처럼 견고해질 동안 파편화된 노동진지는 부스러기처럼 허약해졌다. 더 이상 밀릴 데도 없다.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수많은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울분으로 뒤바뀌고 있다. 짓밟히고 빼앗겨 죽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자고 일어서는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해를 넘겨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들의 봉기는 그 투쟁의 중심이다. 지난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해 벅찬 승리를 쟁취한 씨앤앰 노동자들의 뒤를 이어 통신비정규직 투쟁도 유종의 미를 예감하게 한다.

SK그룹과 LG그룹은 국내 굴지의 거대 재벌이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무거운 대표적인 대기업군이다. 하지만 불법 다단계 하도급 구조 아래 천문학적 이익을 갈취해 온 재벌 그룹이 간접고용 비정규직 양산의 주범임이 백일하에 다시 드러났다. 현대자동차·삼성전자서비스에 이어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까지 재벌 자본의 비정규직 착취를 통한 이윤 축적은 전근대적인 원시적 축적과 흡사했다. 원청기업의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원청기업의 매뉴얼로 일하며 원청기업의 고객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브랜드 가치를 높여 온 설치·수리기사들이 통신 대기업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의 이익을 낳은 황금거위였다. 140일을 넘긴 노숙농성투쟁과 3개월이 임박한 파업투쟁은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임을 자각한 황금거위들의 반란이자 인간선언이다. 마침내 두 사람이 전광판 위에 올라 승리를 앞당겨 가져올 봉화를 피워 올렸다.

밥은 하늘이다. 하늘은 독점할 수 없다. 함께 공유한다. 하늘처럼 밥도 함께 나눌 때 세상이 평안해진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은 하늘처럼 밥을 나누자는 사회적 요구를 쟁취하려는 정당한 투쟁이다. 불법고용의 가장 큰 수혜자인 진짜 사장 최태원 SK 회장과 구본부 LG 회장에게 온당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상식적인 투쟁이다. 구 회장이 칠순을 맞은 그제 조합원 네 사람이 무기한 단식농성투쟁에 돌입했다. 이런 요구를 쟁취하자고 장기파업을 하고, 하늘로 오르고, 굶으면서 길거리 노숙농성투쟁을 해야 한단 말인가.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승리해 다시 땅을 밟을 수 있도록, 피눈물 흘리며 투쟁하는 모든 조합원들이 웃으며 일터로,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엄동설한에 승리의 봉화가 된 통신비정규 노동자 강세웅과 장연의는 옹골찬 희망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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