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24명은 지금도 원직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이소선은 '법정모욕죄'로 1년의 징역을 살고 1978년 8월22일 만기 출소했다. 출소하는 날 새벽 이소선의 가족들과 조합원들이 마중을 나왔으나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 정보부와 경찰들이 이소선을 승용차에 태워 집에까지 데려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1년 만에 사회에 나와 보니 달라진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청계피복노조 조직력이 엄청 약해졌다. 이소선이 구속된 이후 노동교실이 폐쇄되고 9·9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부상당했다. 이소선보다 두 달 전에 이숙희와 신순애가 이미 석방돼 나와 있기는 했지만, 신승철과 김주삼은 아직도 구속돼 있었다. 게다가 가닥을 파악할 수 없는 조직갈등이 첨예해져 조합원 간에 반목이 심한 상태였다.

1년 징역살이 마쳤지만

이때 청계피복노조의 극심한 조직분규는 76년 물러났던 최종인 집행부측이 양승조 집행부가 너무 투쟁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마침내 양승조에 대한 인신공격성 유인물을 전체 상가에 뿌리면서 진흙탕 싸움 양상을 띠게 됐다. 이로 인해 대의원대회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못하고 표류했다. 혼란 끝에 양승조 지부장이 물러나고 김영문이 지부장이 됐다. 김영문은 임현재를 지부장으로 삼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임현재는 그동안 피복공장을 운영해 왔기 때문에 사용주가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 지부장의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의 시비가 있었다.

지부장의 권한을 행사한 임현재는 상근 집행부를 교체했다. 이소선은 새로운 상근 집행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동안 숱한 투쟁에 앞장섰던 간부들은 쫓겨나고 대신 노조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소극적이었던 사람들로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된 것이다. 이 문제로 이소선은 임현재 지부장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임현재는 3개월 동안 노동자 지위를 만든 뒤 대의원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부장으로 선출됐다. 이때 황만호를 중심으로 한 노조 대의원·중견조합원들은 임현재로부터 해임당한 민종덕을 지부장 임명직이 아닌 대의원대회 선출직인 사무장으로 선출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민종덕을 상근 집행부에 복귀시킨 것이다.

이소선이 석방된 지 한 달 남짓 되는 9월22일이었다. 이날 오후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동일방직 사건을 가지고 연극을 공연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소선은 그날 오후 딸 전순옥을 공연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동일방직노조는 이소선이 구속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특히 78년 2월21일 새벽에 벌어진 똥물사건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하고 야비한 사건이었다.

이소선은 동일방직 노동자들한테서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동일방직노조는 그동안 온갖 탄압을 물리치면서 민주노조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에 회사·정부·섬유노조는 한패가 돼 민주노조를 파괴·와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노조는 78년 2월 임시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회사는 자신들의 앞잡이를 지부장 후보자로 내세웠다. 이에 대항해 노조 집행부측에서는 이총각 지부장이 후보자로 나섰다. 대의원대회에 앞서 2월21일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그동안 회사측은 집행부를 '빨갱이 단체'니 '국제공산당과 연계를 가진 단체'니 하며 온갖 비난과 흑색선전을 폈다. 그러나 비열한 술책이 먹혀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불리하게 되자 폭력으로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78년 2월21일 지부사무실에서 조합간부들은 밤새워 투표 준비를 마치고 새벽 6시에 퇴근하는 야근반 조합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자들이 막 작업을 마치고 투표를 위해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화장실 앞에 숨어 있던 회사측 앞잡이 박복례·문명순 등과 남자들 5~6명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 가지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닥치는 대로 조합원들의 얼굴과 온몸에 똥을 쳐 바르고 뿌렸다. 심지어는 어린 조합원을 붙잡아, 강제로 입을 벌리고 똥 덩어리를 처넣기까지 했다. 기겁을 해서 달아나는 여자조합원들을 굶주린 늑대처럼 쫓아다니며 젖가슴에 똥을 집어넣기도 했고 통째로 뒤집어씌우기조차 했다.

동일방직 사건의 전말

▲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 해직 인정자 복직권고 이행과 불이익행위 근절을 촉구하며 78년 당시 일명 '똥물사건' 사진을 걸고 있다. 오마이뉴스
"저년을 잡아! 저 쌍년이 주동자야, 저년을 잡아 똥을 먹여!"

박복례와 문명순은 앞장서서 조합간부들을 지목하며 남자들을 선동했다. 난동자들은 탈의실과 기숙사까지 쫓아 들어와 똥을 뿌려 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현장에는 노조에서 요청한 수명의 정·사복 경찰관과 본조에서 파견된 간부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경찰 아저씨들 뭐하고 있어요! 우리 좀 살려 주세요!"

다급한 여자조합원이 경찰들에게 구해 달라고 울먹였다.

"야! 이 쌍년아! 가만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 똥 맛이 어때!"

경찰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키득거리며 웃기만 했다. 본조 간부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난 듯 박수까지 쳐 가며 발을 굴렀다.

박복례 등과 남자 조합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부사무실에 마련된 투표함과 사무용구들을 몽둥이로 때려 부쉈다.

"네년들이 투표하게 우리가 놔둘 줄 알았어?"

"아무리 가난하게 살았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너희 놈들이 인간이냐!"

조합원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현장에 찬 새벽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결국 회사측이 조종한 폭력배들에 의해 동일방직노조는 파괴됐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야만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았다. 3월10일 노동절 행사장에서의 투쟁, 성당에서의 단식농성투쟁, 부활절 여의도 예배장에서의 투쟁 등 조합원들의 끈질긴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78년 4월1일자로 회사측은 124명의 조합원들을 대량으로 해고시켰다. 경찰은 지부장을 비롯한 조합간부들을 구속·수배했으며, 어용 섬유노조는 김영태 위원장이 앞장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각 사업장에 배포했다. 자본·권력·어용노조가 3박자를 맞춘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에 대해 언론은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9월22일 연극공연은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회에 널리 알리고, 민주인사들과 연대를 꾀하기 위해서 마련된 행사였다. 이소선은 연극공연이 거의 끝나 갈 무렵에 기독교회관에 도착했다.

기독교회관 주위에는 기동대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정문으로 통하는 길에 꼭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도록 기동대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장벽을 치고 있었다. 이소선은 그 사이를 뚫고 2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공연장은 노동자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똥물을 뿌리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연기를 하던 노동자들이 통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배우들은 더 이상 연기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서럽게 울부짖었다. 관객들도 한 물결이 됐다. 강당 안은 울음바다였다. 앞부분을 보지 못했던 이소선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목 놓아 울어도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밤 9시께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뼈에 사무치는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노동자들은 강단 앞에 붙여 뒀던 플래카드를 떼어 내어 들었다.

"노동 3권 보장하라!"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그들은 구호를 외치며 강당을 뛰쳐나갔다. 회관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기동경찰들이 회관 입구를 철벽처럼 가로막았다. 1층 현관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구호를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노동자들을 삽시간에 연행해 갔다. 공연에 참석한 노동자와 민주인사·학생들은 어느새 강당 북쪽의 베란다로 몰려갔다. 이들은 회관 정문쪽의 베란다에도 몰려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과 시민·학생들의 구호가 점차 격렬해졌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다시 짓밟히는 노동자들

강당은 자연스럽게 농성장이 됐다. 강당 밖에서는 경찰이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강당으로 난입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회관 안에 있던 노동자·학생·재야인사들이 회관 정문쪽 베란다로 몰려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순간 100여명의 사복형사들이 2층 강당으로 난입해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면서 기도회 참석자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경찰의 폭력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쏟아져 나오고 회관 안은 아수라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들은 대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경찰들에게 당했다. 그 무자비한 군홧발이 이소선을 낚아챘다. 그대로 나자빠진 이소선은 머리·가슴 가리지 않고 수없이 쏟아지는 군홧발에 사정없이 짓밟혔다. 숨이 막혀서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거의 초죽음이 되다시피 한 이소선을 2층 계단으로 질질 끌고 내려가더니 기동대 차에다 던져 버렸다. 이소선을 비롯해 연행된 많은 사람들은 동대문경찰서로 실려 갔다. 이들은 동대문경찰서 조사실에서 또 한 차례 구타를 당한 뒤 유치장에 던져졌다.

이소선은 쉰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그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경찰들과 싸우고, 그때마다 얻어맞으며 살아왔다. 경찰서나 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까지 당해 봤지만, 이날처럼 혹독하게 두들겨 맞은 적은 없었다. 이소선은 평생 그때 두들겨 맞은 후유증 때문에 온몸에 어혈이 맺혀 날만 궂으면 신경통으로 고통을 당했다.

이소선이 유치장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여기저기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전쟁통에 폭격이 휩쓸고 간 뒤의 처참한 광경인 듯했다. 유치장까지 끌려온 사람을 대강 헤아려 보면 박형규 목사 내외와 조정하·조화순·안강수 목사·이총각 지부장 등이다. 이 중 딸 전순옥도 있었다. 전순옥 역시 얼마나 심하게 짓밟혔는지 허리가 아프다고 신음을 하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다음날 저녁 이소선의 둘째 딸 전순덕이 옷 보따리를 가지고 면회를 왔다. 면회를 온 전순덕은 어머니를 마주하고서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입만 삐쭉거리고서 옷 보따리만 내밀었다. 불만스러운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사실 이소선은 딸 순덕이의 태도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순덕이한테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막내딸 순덕이가 아주 어렸을 때 전태일 사건이 났다. 그때부터 이소선은 집안일은 제쳐 놓고 노조 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전순덕은 성격이 워낙 착하고 이해심이 많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노조활동을 하는 어머니를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소선의 집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손님이 들끓었다. 막내딸은 이 방 저 방 쫓겨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잠을 자야 했다. 속으로는 참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더구나 77년에 어머니가 구속되자 많은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징역을 살고 나온 지 한 달 남짓밖에 안 됐는데 엄마와 언니가 유치장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럽게 느껴졌겠는가.

이소선은 어미로서 한없이 미안하고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이소선은 옷 보따리를 받아들며 어린 순덕이를 끌어안았다.

'이 어린것한테 어미라는 게, 허구한 날 이런 꼴만 보여 줘야 하다니.'

이소선으로서는 아들 전태삼이나 큰딸 전순옥은 스스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그들한테는 덜 미안했다. 그러나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라고 여겨서인지 순덕이에게만은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순덕아! 미안하다. 어떻게 하겠니? 세상이 이런 걸."

막내 순덕이는 더 이상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고개만 푹 숙였다.

"몸조심하세요!"

'저 착하고 순진한 아이들이 슬픔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돌아서는 순덕이의 자그마한 등을 보면서 이소선은 상념에 잠겼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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