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삼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

형!

또다시 찬바람이 스산하게 뼛속을 파고드는 11월이 왔습니다. 메마른 잎 하릴없이 흩어지는 이 쓸쓸한 모란동산에 형을 만나러 오는 길은 그래도 뭔지 모르게 따스한 정감이 흐르고 위안이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형의 체취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남아 온몸을 돌고 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난했던 지난 시절 파고다공원 담벼락에 사과궤짝을 놓고 한뎃잠을 잘 때도 형은 언제나 동생들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했지요. 용두동 골목길 솔 조리장사에 지치고 리어카에 온몸이 녹초가 돼 철없는 내가 투정을 부려도 형은 언제나 따스하게 감싸 줬지요. 형의 이런 사랑은 가족에 한정되지 않고 평화시장 어린 동심 더 나아가 이 땅의 모든 노동자 서민대중 아니 인류애로까지 한없이 넓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도 나요, 나를 모르는 모든 사람도 바로 나라고 말씀하시고 이 모든 나를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스스로를 죽이고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산한 계절에도 형을 만나러 오는 길은 언제나 따스했습니다.


사랑하는 형!

그런데 오늘은 왜 이리도 마음이 무겁고 뼛속 골골이 시리고 아픈가요. 형이 꿈꾸던 세상인 "서로 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하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상"으로 우리 역사가 퇴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은 일찌감치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 노력하겠다"고 스스로의 결의를 다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스물두 살 청년노동자가 산업화 초기에 고뇌하던 문제가 반백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그 모순이 첨예화되고 가중되고 있음을 올해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보여 준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세월호 침몰사건은 사람과 생명보다 돈과 물질과 권력을 숭배하는 탐욕스런 인간에 의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형이 그렇게 증오했던 인간을 물질화하는 무시무시한 세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물질화하는 무시무시한 세태는 무었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과 생명이 주인이 아닌 물질, 돈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인 천박한 자본주의 구조 때문입니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안전과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자신들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저질렀고 권력은 이것을 비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침몰한 배에서 수백명의 생명이 살려 달라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는 죽어 가는 생명을 방치하고 구경하면서 돈만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304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을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이게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런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국민을 정권과 저질언론이 왜곡·음해·조롱·압박·비난하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어린 학생의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만 했습니다. 진정성 있게 참회하고 성찰하고 총체적인 부실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정치인은 진상을 요구하는 사람을 향해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것 같다"고 주장하면서 유가족의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 "부당한 요구"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순수한 청소년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아이들한테 용서를 빌고 반성하기는커녕 이렇게 모질고 야속한 발언을 쏟아 냈습니다.


사랑하는 태일이 형!

형은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적 문제를 고민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 권력을 가지려는 자야말로 인간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2012년 8월28일 당시 박근혜 대선후보가 전태일재단을 방문했을 때 "일방적 통행이 아닌 사람이 통하는 길로 오시라"고 요구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당한 해고에 생존권을 잃고 몸부림치며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것들을 외면한 채 단순히 정치적 제스처를 위해 화해니 통합이니 하는 진정성 없는 정치쇼에 놀아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 후보를 정중하게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인간이 통하는 길로 오시지 않은 결과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댓글사건으로 정권의 정통성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이남종이라는 사람이 분신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노동자 문제는 또 어떻습니까. 철도·의료 등 공공재를 민영화시켜 탐욕스런 자본의 먹잇감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을 침탈하는 만행까지 저질렀습니다.

정권은 불법적인 전교조 탄압으로 공연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삼성재벌은 노동자 탄압으로 최종범 열사의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인간이 통하는 길로 오지 않은 박근혜 정권은 날이 갈수록 서민들의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개악시켜 휴일근로수당을 빼앗으려 합니다. 나날이 치솟는 전셋값은 서민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세금인상에다 심지어는 범칙금까지 올려 서민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얼마 전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 부잣집 주인에게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입니다.

사회의 골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철저하게 반서민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정권입니다. 그럼에도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질언론을 양산해 권력의 손아귀에 넣고 진실을 가리면서 여론을 호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전태일 형!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도 우리는 형의 가르침대로 인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스산한 계절에 그래도 형의 따스한 인간애를 그리워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함께 모인 사람들과 형의 뜻을 잊지 않고 사는 나의 또 다른 나와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가겠습니다. 그리하여 형이 살아오는 만큼 다가오는 '사람 세상'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2014년 11월
전태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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