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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32] 유신 공포정치 노동자·학생 짓누르다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을지로6가 유림(협성)빌딩에 새로 마련한 노동교실. 청계피복노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청계피복지부 새마을 노동교실’을 놓고 사용주를 앞세운 정치권력과 노동조합 간에 싸움이 시작됐다. 권위주의적인 정치권력은 근로자를 위한다는 전시효과를 내세우기 위해 노동교실을 허가해 줬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교실을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운영함으로써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마비시키고, 정부의 시책을 교육·홍보하는 장소로 활용할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노동자를 노예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발상이었다.

노동조합은 노동교실을 진정으로 노동자를 위한 공간으로서 노동자들의 권리의식과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하는 장소로 만드는 데 초점을 뒀다. 노동자를 단결시키는 만남의 장이요, 투쟁의 장이 되게끔 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끈질기고 치열한 투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함석헌 선생 초청에 대한 시비가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달이 났다. 노동교실이 문을 연 지 이틀이 지난 1973년 5월23일이었다. 노동교실의 임대주이며 동화상가 주식회사 사장인 유인규는 자신이 노동교실의 설립추진위원장이었음을 빌미 삼아 추진위원회를 ‘관리위원회’로 개칭해 버렸다. 유인규 사장은 청계피복지부가 운영을 담당한다는 당초의 취지를 뒤엎고, 교실을 자신이 전면 관리·운영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노동교실 폐쇄한 임대주

유 사장은 선언으로 끝내지 않고 노동교실에 출입하는 노조 간부들을 폭력적으로 추방하고 교실 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그는 7월3일에는 노조와 일체 상대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교실의 관리자와 실장을 임명·배치했다. 또한 노동교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유물이니까 자신의 책임하에 노조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운영하겠다고 공언했다.

자본가다운 독선이요, 이기주의였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네 것, 내 것의 소유의식과 이기주의·경쟁주의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함께 나누고, 공유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개관식 때 걸었던 간판을 떼어 내고 ‘시장상가 새마을 노동교실’이라는 간판을 마음대로 달았다. 경비들을 시켜 나이 어린 시다를 모집해서 중등반 기초과정 교육을 일방적으로 진행했다. 학생을 모집할 때 장차 고등공민학교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선전까지 했다.

노조는 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교실의 운영을 지부가 맡지 못하기 때문에 개관 8개월이 지났지만 정상적인 노동교실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노조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를 뜯어고치기로 결정했다.

노조는 이 같은 사실을 노동청에 알리고 개관할 때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노동청은 "노사가 협조해서 정상적으로 운영하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답변이라고 늘어놓았다.

노조는 이에 세부지침을 마련했다. 주요 내용은 △노동교실은 지부가 설립한 평화교실의 발전적인 소산인 만큼 설립취지에 부합하도록 지부에서 운영을 주관할 것 △노동교실의 운영·직제 및 특별회계예산의 근거를 제도화할 것 △설립목적에 충실하도록 책임 있는 운영체계를 갖출 것 △점차적으로 교육전문기관으로 확대·발전시킬 것 등이다.

노조는 다른 한편으로 노동교실이 당초 취지에 맞게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 ‘아프리’의 지원하에 새로운 노동교실 장소를 확보했다. 그곳이 을지로6가 유림(협성)빌딩이다.

▲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25일자 동아일보. 민종덕


유신폭압 맞선 민주세력 반격 시작

온 나라를 얼어붙게 만든 유신폭압하에서도 민주주의와 생존을 지키기 위한 민중의 투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오로지 강권과 폭압으로 국민을 억눌러 침묵을 강요했지만, 강요된 침묵 속에서도 불만과 저항의지는 광범위하고 강렬하게 쌓여 갔다. 유신독재는 이성을 잃은 탄압을 자행했다.

73년 8월8일 유신독재의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 납치·귀국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은 납치 도중 김대중을 현해탄에서 수장(水葬)시키려고 했다. 이 사건은 각계의 거센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같은해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는 교내 4·19 기념탑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2시간여 동안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정보·파쇼통치 즉각 중지,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대일 경제예속관계 즉각 중지 및 국민생존권 보장 △중앙정보부 즉각 해체 △김대중씨 사건 진상규명 등 4개항을 요구했다.

이날 시위는 유신 이후 최초의 공개시위로 기록됐다. 유신폭압 체제에 대한 민주세력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기폭제로 11월에 들어서자 전국 각 대학이 일제히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 나갔다. 재야인사들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투쟁 결의를 다졌다. 73년 12월부터 재야 민주인사들이 유신헌법 개헌청원운동을 공개적으로 감행했다.

100만인 서명을 목표로 한 이 운동이 전개되자 박정희는 12월29일 담화문을 통해 개헌운동을 즉각 중단하라고 발표했다. 이어 74년 1월8일에는 개헌운동을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1호로 인해 개헌청원운동을 벌이던 장준하·백기완씨 등이 구속되고 종교계에서도 이규상 전도사 등이 구속됐다. 서강대의 박석률 군을 비롯해 다수의 학생들 역시 구속됐다.

74년 개학과 동시에 학새들은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박정희는 74년 4월3일 밤 10시를 기해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관련해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것이다.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으로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그들과 결탁해,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와 같은 공개사회가 지니는 특성을 역이용해 표면상으로 합법성을 가장, 그들의 정체를 위장하고 우리나라 각계각층에 침투를 획책했습니다. 그리하여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해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인민혁명의 수행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 민청학련 사건 일으키다

담화문 발표와 동시에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고 수배됐다. 74년 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을 요약해 보면 민청학련 주동학생들은 4단계 혁명을 통해 이른바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부를 세울 것을 목표로 과도적 통치기구로서의 민족지도부 결성까지 계획했으며,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됐다는 것이다. 학생을 포함한 1천24명이 조사를 받고 이 중 254명이 군법에 송치돼 54명이 1차로 기소됐다.

이소선은 민청학련 사건을 보면서 섬뜩했다. 공산당의 조종을 받은 학생들이 체제전복을 꾀한 사건이기 때문에 최고 사형에서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장기징역이 불가피하다는 발표를 봤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중징역을 살리겠다는 의도도 무서웠지만 관련자 중 많은 사람이 그가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더욱 놀랐다. 전태일이 죽어서 성모병원에 있을 때 그를 찾아와 자신들이 사체를 인수해 장례를 치르겠다던 학생들과 그 당시에 경찰에 잡혀간 유인태·이철 등이 수배되고, 영안실에 맨 처음 찾아왔던 장기표를 찾는다고 난리법석이었다.

경찰은 민청학련 사건 수배자를 검거하기 위해 그들의 사진이 박힌 전단을 수없이 뿌리고 다녔다. 길거리의 벽에는 온통 도배를 해 놓은 듯 수배벽보가 붙었다. 그들이 모의한 장소로 지목된 방학동을 중심으로 도봉구 일대에는 검문·검색하는 경찰들로 가득 찼다. 동네방네 그들을 신고하라는 스피커 방송이 요란했고 형사들은 큰길, 작은 길 할 것 없이 경계망을 쳐 놓고 오가는 모든 사람의 신분증을 조사했다. 뿐만 아니라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집집마다 간장독까지 뒤질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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