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6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아들은 찢어지고 구멍이 뚫린 옷을 입은 채 맨발을 드러내며 꿇어앉았다. 몇 년 전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화려한 옷을 입고 당당하게 집을 나설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술과 쾌락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어느새 받은 유산은 모두 탕진되고 그에게는 병든 육신과 가난과 죄책감만이 남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염치없게도 다시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는 아버지께 간청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는 누추한 모습의 아들을 보자마자 호통을 치기는커녕 목을 껴안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종들에게 “잃어버린 아들을 도로 찾았으니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먹고 즐기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혀라”고 말한다.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용서한 것이다.

이 그림은 성경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렘브란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시킨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왜 마지막 순간, 이 그림을 그린 것일까. 그는 이 그림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걸까. 렘브란트는 ‘아들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인자한 아버지’를 묘사하는 것에 더 파고든 듯하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손 한쪽은 남자의 손으로, 다른 한쪽은 여자의 손으로 그렸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

어쩌면 그를 내칠 수도 있었을 강한 아버지이지만, 그를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는 따뜻한 어머니의 역할도 하는 존재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왜였을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침내 숨을 거둔 뒤 돌아갈 곳에 계시는 아버지, 바로 신(神)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말이다. 바로 렘브란트 자신이 ‘돌아온 탕자’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아래에 위치한 레이던에서 태어났다.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적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덕에 가난한 부모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했다. 재능은 활화산처럼 분출했고, 그에 비례해 그림 주문이 쇄도했으며 렘브란트 아래에서 배우고 싶다며 많은 제자들이 작업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단시간에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성공이 정점에 오른 사건은 1634년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와의 결혼이었다. 사스키아는 당시 렘브란트와 같은 집에서 살던 미술품 딜러 헨드릭 반 아윌렌뷔르흐의 사촌이었으며, 네덜란드 북부의 프리슬란트 시장의 딸이었다.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던 그녀는 지참금으로 4만길더의 거금을 가지고 왔다. 결혼은 렘브란트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줬고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줬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탄 듯한 신분상승이 그의 허영심을 자극했던 것일까. 이제부터 탕자 렘브란트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명성’에 맞게끔 1639년, 대리석과 벽돌로 지은 고급저택을 구입했다. 너무 값비싸서 먼저 4분의 1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잔액을 5~6년 내에 갚기로 약속할 정도로 무리한 구입이었지만, 그는 미래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의 팽창속도는 너무도 빨라 수입의 팽창속도를 훨씬 상회했다.

렘브란트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들였다. 화약을 담는 터키산 뿔통, 오리엔트 민속의상 등과 모사용 판화와 그림, 대리석으로 된 조각들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얼마나 사들였는지 당시 사람들은 렘브란트를 ‘사재기 수집가’로 불렀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니, 처가 식구들은 그의 낭비벽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아내의 지참금을 허비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여타 사람들이 보기에 렘브란트는 ‘방탕한 사내’ 그 자체였다.

그런 가운데 그에게 불행이 닥쳤다. 아이들이 연이어 태어났지만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었다.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그해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다음해에는 지금껏 산후조리를 도와줬던 아내의 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네 번째 자식인 아들 티투스가 겨우 살아남아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이번엔 죽음의 마수가 아내에게 닥쳤다. 사람들은 ‘탕자’에게 벌이 내려졌다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 ‘회개’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장 아들의 유모로 들어온 헤르트헤 디르흐가 그의 정부가 됐다. 렘브란트는 그녀에게 아내가 남긴 귀금속을 마구 퍼다 줬다. 그러다가 뒤에 가정부로 들어온 헨드리키에 스토펠스와도 내연의 관계가 되자 마침내 진흙탕 싸움이 시작됐다. 별거수당을 주고 헤르트헤를 쫓아내려고 하자, 헤르트헤는 렘브란트가 결혼약속을 어겼다고 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렘브란트에게 연간 200길더를 지불하라는 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렘브란트는 헤르트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녀를 정신병자 수감원에 넣어 버렸다.

‘나쁜 남자’ 렘브란트는 사실상 아내였던 헨드리키에와도 재혼을 하지 않았다. 사별한 아내 사스키아가 4만길더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유언장에 이렇게 적시했기 때문이다.

“유산의 반은 아들 티투스에게 할당한다. 티투스가 성인이 되거나 결혼하기 전에는 이 돈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렘브란트의 몫이다. 하지만 그가 재혼하면 이 모든 게 무효가 된다.”

그는 이 손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일단 그는 값비싼 집을 사면서 진 빚을 갚는 데 허덕이고 있었고, 골동품을 사들이는 등 수입 이상으로 지출하는 버릇은 나아지지 않았다. 금융시장과 은행과 상거래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에서 낭비는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방탕한 렘브란트에게로 들어오는 주문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렘브란트의 복잡한 사생활 역시 자신을 고립시켰다. 당시 상류사회는 도덕성 혹은 사회적 체면을 이유로 종교적 원칙과 위배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과는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곤두박질쳤고 가난해졌다.

1656년에 이르러 렘브란트는 파산했고 빈민촌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면책되지 않은 파산자’로 지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1662년에는 아내의 묘지터까지 팔아야 했다. 불행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1663년 흑사병에 걸린 헨드리키에가 또 렘브란트에 앞서 저세상으로 갔고, 1668년에는 아들 티투스마저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아들이 죽었을 때마저도 마음 놓고 애도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렘브란트 주위에는 빚쟁이들이 늘 눈을 빛내고 있었다. 혹여나 티투스의 유산을 빚쟁이들이 빼앗아 갈까 봐 급히 조치를 취하는 것이 먼저였다. 노심초사와 전전긍긍. 렘브란트의 말년은 그런 식이었다.

마침내 1669년 10월4일 ‘탕자’ 렘브란트는 63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를 용서하고 받아 줄 ‘아버지’ 같은 사람은 곁에 없었다. 무덤에는 이름 하나 새겨진 비석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그것이 ‘탕자’에 걸맞은 무덤이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일까.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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