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아저씨의 합성어인 ‘개저씨’란 신조어가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개저씨는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직장과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에게 성추행과 성희롱을 일삼는 아저씨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른바 '아랫도리'를 간수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어른에 대한 비난과 혐오가 담긴 표현이다.

사실 직장내 성추행과 성희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새는 불안정한 고용까지 범죄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다. 17개월 동안의 수습기간을 거쳐 정직원이 됐지만 성추행 사실을 고발했다가 쫓겨난 한 유명 출판사 직원 A씨가 그렇고, 일곱 번 근로계약을 갱신하고도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성추행까지 감내하다 계약해지된 중소기업중앙회 계약직 B씨가 그렇다. 성범죄 피해자가 ‘독박’을 쓰는 비정상적인 모습에 청년들은 개저씨라는 멸칭으로 울분을 토하고 있다. 우리사회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제2의 A씨, B씨는 부지기수다. <매일노동뉴스>가 만난 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성욕과 권력의 화학적 반응

외국계 의류회사에서 볼꼴 못 볼 꼴 다 보며 10년을 견딘 직원 김수연(32·가명)씨. 체질적으로 술을 못하는 그는 10년여 동안 직장 상사가 후배 여직원들의 몸을 쓰다듬는 모습을 맨정신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성추행은 대부분 회식자리에서 발생했다. 회식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노래방은 특히 성추행·성희롱의 온상이 됐다. 밀폐된 공간,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에서 40·50대 직장 상사들은 술기운을 빌려 여직원들의 몸을 더듬었다.

여직원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는 일도, 어깨동무를 하며 어깨를 만지는 일도 다반사다. 심지어 다른 직원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옆에 앉은 여직원의 허벅지 안쪽에 손을 넣는 모습도 봤다. 성추행을 당한 여직원은 에둘러 싫은 내색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다른 여직원들은 성추행 현장에서 고개를 돌렸다. 김씨는 “괜히 말을 꺼냈다가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웠다”고 한숨지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동안 성추행은 반복됐다. 문제를 제기했던 직원도 있었다. 손버릇이 좋지 않았던 C과장이 노래방에서 신입사원의 허벅지에 손을 대자 그가 이런 사실을 인사과에 알린 것이다. 그러나 C과장이 발뺌하자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자의 행실이 어떻느니 하는 뜬소문이 돌았다. 결국 그 신입사원은 퇴사했다.

김씨는 “40·50대 나이의 상사들이 회식자리에서 동료 직원들을 접대부 대하듯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부하직원이 싫은 티를 내도 얼굴색 하나 안 바뀌는 모습을 보면 정말 자력갱생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김씨는 “남자 직원들에게 관대한 직장문화와 직급이 높을수록 조용히 넘기려는 회사 분위기 때문에 성추행 문제가 근절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정치성향과 성희롱은 다른 문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인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인권운동가가 되고 싶었다는 금아름(29·가명)씨. 그의 바람은 2010년 어느 날 술자리에서 잔인하게 깨졌다. 금씨는 이날 단체의 대표인 D씨를 비롯해 활동가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D씨는 진보진영에서는 유명인사 축에 들었다. 술자리는 자연스레 1차에서 2차, 그리고 3차까지 이어졌다. 취한 활동가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D씨와 금씨가 단둘이 남았다. D씨는 그의 연구실에서 술을 한잔 더 하자고 제안했다. 금씨는 D씨에게 인권 활동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술기운이 금씨의 경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연구자인 D씨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만큼 그를 따라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금씨의 허락 없이 몸에 손을 댔다. 다음날 금씨는 성추행 사실을 알리고 항의했지만 D씨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했다. D씨에 대한 신뢰와 함께 인권활동에 대한 열망도 흔들렸다. 잠시 휴식기를 가진 뒤 금씨는 단체에 복직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씨는 “인권단체는 말과 운동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며 “그 일이 있은 뒤 평상시 도덕적인 체하며 사는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려면 범죄자를 제대로 처리하는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는 “한 건이라도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해 제대로 처리하면 경각심이 생기고, 피해자들도 용기를 얻어 제보할 수 있게 된다”며 “성범죄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불이익을 보는 상황에서 직장내 성범죄가 줄어들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 대처방법조차 모르고, 인사부서의 비전문가에게 일임해 피해자에게 2차 피해나 불이익을 주게 된다”며 “직장에서 성범죄 처리 절차를 만들어 피해자는 보호하고 가해자는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평적 조직문화도 해법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할 필요도 있다. 조직문화를 좀 더 수평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직원 30여명 규모의 IT기업인 E사는 평등한 직장 분위기로 직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이상호(33·가명)씨는 "2년여 동안 근무하면서 회식 자리에서 부적절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직급이 높은 남자 상사가 여직원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거나 노래방에서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지도 않는다. E사의 대표는 성별에 관계없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겼다.

이씨는 “전에 다니는 회사에서는 여자가 따르는 술이 좋다고 말하는 상사도 있었지만 E사의 사내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며 “회식 때마저도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협업해 나가는 분위기가 이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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