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은 이중섭(1916~1956)이다. 힘찬 필치의 ‘황소’그림을 그린 그 화가, 이중섭이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황소가 콧김을 내뿜으며 캔버스 밖을 뛰쳐나올 듯했던 평소 이중섭의 그림을 생각해 보면 이 연작의 ‘조용함’은 굉장히 의외일 정도다.

4개의 그림 모두 구성은 같다. 집 창문에 몸을 기댄 남자와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돌아오는 여자가 대칭적으로 묘사된 구도다. 여인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는 반면 그림 속 사내는 마치 여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이처럼 죽기 전 이중섭은 같은 주제의 그림을 여러 점 그려 낼 정도로, 정적인 ‘기다림’의 정서에 감화돼 있었다. 제목조차 ‘돌아오지 않는 강’이다. 이중섭은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이중섭의 삶의 시작은 평탄했다. 평안남도 평원에서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나고 자라서 어려운 시절에 일본으로 미술유학까지 갔던 행운아였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 6·25 전쟁이 터져 월남하게 되면서 내리막길 인생을 걷게 된다. 맨몸으로 부산까지 내려온 뒤 막노동을 하며 밑바닥 피란생활을 했고 결국 병들어 4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러나 그는 가난 속에서도 예술혼을 마음껏 꽃피운 사람이었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담뱃갑 은지에도 그림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는 이중섭.
 

▲ 이중섭과 이남덕의 결혼사진
▲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연작, 종이에 연필과 유채, 1956년, 개인소장


엄혹한 상황에서도 그가 그림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사선(死線)을 넘어온 사랑,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였다.

‘조선 제일 화가’가 되고 싶었던 청년 이중섭은 20살에 일본 분카가쿠잉(문화학원)으로 유학을 간다. 그리고 이때 2년 후배인 마사코를 만나 첫눈에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는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의 여성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포연이 가실 날이 없는 시대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어려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이중섭은 마사코를 두고 조선으로 귀국했지만 이중섭을 잊을 수 없었던 마사코는 결단을 내린다. 마사코는 1986년 <계간미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소화 20년. 그러니까 1945년 4월이었습니다. 저는 나흘이나 걸려서 일본 규슈 하카타에 도착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때라 교통편이 전무하다시피 했죠. 당시의 일본은 도처에 매일처럼 아메리카 군 비행기의 폭격이 있었으니까요. 정말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그야말로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여행이었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니까 이번엔 한국으로 가는 배가 없다는 거예요. 얼마 전 정기연락선이었던 금강환이 아메리카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카타로 나와서 임시연락선을 타게 된 거죠.”

천신만고 끝에 만난 그들은 1945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 재벌 미츠이재단 임원의 딸 ‘야마모토 마사코’가 식민지 조선화가의 아내 이남덕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꿈결 같은 신혼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그 당시 한반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이중섭 가족도 부산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그 이후의 피란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경제적 상황도 그랬지만, 이남덕의 국적도 문제였다.

이중섭이 피란민 조사를 받다가 아내가 일본 여자라는 사실이 가장 먼저 문제가 되면서 신분을 의심받게 된 건 물론이거니와 이남덕이 일본 여자라는 걸 알아챈 피란민들도 그를 핍박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피란생활 가운데서도 뜨내기 생활을 해야 했다. 1년6개월 사이에 부산과 제주도, 다시 부산을 거치는 생활을 하면서 이남덕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했고, 두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렸다.

극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결국 이남덕은 1952년 7월 제3차 귀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잠시’ 돌아가 있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중섭은 이 결정이야말로 스스로의 삶을 파멸시킬 싹이 될 줄 알기나 했을까. 이후의 삶이 증명해 주듯, 이중섭에게 이남덕의 부재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가족이 있었기에 가난해도 행복했지만, 가족이 떠나자 이제 중섭에겐 가난만 남은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남덕과 다시 결합해 사는 꿈을 꿨다.

“오늘로 1년째가 됩니다. 1년 또 1년, 이렇게 헤어져서 긴 세월을 보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있지 않아선 안 되오.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들떠 있는가를 생각해 보구려. 힘을 내 주시오. 꼭 확실한 성과를 거두도록 하시오. 답장 기다리오.”(1954년 여름 이중섭이 이남덕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은 참으로 소박한 욕구다. 그러나 이중섭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숙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중섭의 학교 후배가 이남덕에게 사기를 쳐 빚을 안겼다. 뒤이어 일본에 밀항했다가 체포된 이중섭의 친구가 이남덕에게 보증금과 여비를 빌리고는 이를 돌려주지 않은 사건까지 터졌다. 이중섭은 그림을 팔아 빚을 갚고자 노력했지만 평단의 호평과는 달리 거의 팔리지 않았다. 갈수록 가족과의 재회는 멀어져 갔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진 것 같다. 1955년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과 앞뜰을 열심히 청소하는가 하면 여관 사람들의 신발을 모두 닦고 동네 아이들을 불러다가 열심히 씻어 주기도 했다.

“그림을 그립네 하고 세상을 속였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거식증도 따라왔다. “세상을 위해 일한 것이 없으니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이중섭은 앞서 봤던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그렸다.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다가 잠깐 동료화가 한묵의 집에 왔을 때였다. 한묵은 이 작품이 그려졌던 상황을 <계간 미술> 1986년 가을호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하루는 시내에서 돌아와 방문을 여니 신문광고를 잘라 벽에 붙여 놓고 나보고 보라는 듯이 씩 웃고 있었다. 당시 상영 중이던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영화 제목이었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굵은 선으로 테두리를 그려 놨는데 바로 밑에는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잔뜩 붙여 놓았다”

이중섭은 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돌아오지 않는 강'의 영화 제목을 어쩌면 자신과 아내를 가로막는 운명에 빗대어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내와의 편지연락에 연연하던 그는 이 무렵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돌아오지 않는’, 아니 ‘돌아오지 못하는’ 아내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을까. 언젠가 만날 것이라는 희망마저 사라진 그 앞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 건너로 향할 준비를 한다.

1956년 7월 말, 폭음으로 인한 간염으로 서대문 적십자병원 내과에 입원한 이중섭은 결국 그해 9월6일 쓸쓸히 숨을 거뒀다. ‘무연고자’로 신고된 그는 3일 후 뒤늦게 사실을 안 친구들이 그의 몸을 거둬 줄 때까지 시체실에서 방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원을 이뤘다. 이중섭의 친구들이 그를 화장한 후, 남은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나머지는 일본의 아내에게 전해 줬기 때문이다. 이남덕은 남편의 뼛가루를 집 뜰에 고이 모셨다. 뼛가루로나마 그는 이남덕에게 돌아간 것이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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